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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줄 물어뜯는 강아지

부모님을, 강아지를, 나를, 내 공간을 돌보는 마음

by 비잉벨

고독할 권리를 위해 구한 5.9평짜리 작업실은 집에서 천천히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마을버스를 타면 10분 안쪽으로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째, 돌아온 캥거루이자 재취업준비생인 나의 요즘 일상은 이렇다.



새벽 4시에는 출근하시는 아빠의 기척을 어렴풋이 들으며 깬다. 꼭 깨끗이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머리카락이 단정해지도록 스프레이를 뿌리는 소리. 깔끔한 아빠를 보고 자라서 나는 세상 모든 남성들이 저렇게 그루밍에 신경쓰는 줄 알았다. (아니라는 사실은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깨달았다.) 아빠는 6개월 전 척추수술을 하시고 아직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 출근 준비 소리가 큰 소음은 아닌데도 나는 화들짝 놀라 깨곤 했다. 걸음이 불편하신 아빠가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지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으로 파드득 깨는 것이다. 불안이 가득한 마음으로 깨어 배웅을 하고 다시 잠든다. 운이 좋으면 6시까지 잘 수 있고, 운이 나쁘면 잠이 홀라당 깨 버려 6시에 엄마가 강아지 산책을 갈 때까지 하릴없이 핸드폰을 본다.



6시부터는 엄마가 강아지 산책을 위해 준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배변봉투 가방 챙기는 소리, 옷을 챙겨 입고 목줄을 들면 강아지가 벌써 신나서 종종거리고, 엄마는 그 모습이 귀여워 "좋아? 그렇게 신나?" 하면서 튼튼한 목줄을 채운다.


강아지 호돌이는 14kg 진도믹스 4살 수컷이다. 집에 있을 때는 세상 순하고 조용하고 애교많은 강아지인데 1년 전 동네 시바견 친구에게 물린 이후로 대견 공격성이 강해졌다. 지나가다 개를 마주치면 위험할 정도로 달려든다. 마치 "내가 먼저 물거야!!! 이번에는!!! 물리지 않아!!!!" 하는 느낌이다. 못 가게 잡아당기면 제 목줄을, 심하면 꼬리 쪽을 물어 뜯으며 자해같은 행동을 한다. 이 상황이 그만큼 싫고 겁난다는 뜻이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안쓰럽지만 사실 호돌이는 혀를 내밀고 웃지 않을 때는 개가 아니라 늑대 같아보일 정도로 위엄있고 늠름하게 생겼다. 한 마디로 무섭게 생겼다. 누가 봐도 위협적으로 생긴 검은 진돗개가 달려든다? 동네 사람들은 기함을 하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래서 개와 사람을 피해 이른 새벽과 늦은 밤에만 산책을 다니고 있다. 방문 훈련사를 불러 2시간 정도 훈련을 받아 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고집이 어마어마하게 센 녀석이네요.
가능하면 2인 1조로 산책 다니세요.
보호자님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호돌이는 아빠가 지인에게 (무책임하게) 분양받아 6개월간 우리집에서 키우고, 서천 시골집에 데려가 집 지키는 개로 살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도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안기듯 다가오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몇 개월간 친척 아저씨에게 밥과 물을 얻어먹으며 빈 집을 지켰다. 2022년 겨울에 내가 책을 쓰느라 10일간 시골집에 머물 때 든든한 집필 동료가 되어주기도 했다. 결국 혼자 두는 것이 눈에 밟히고 마음에 밟혀 2년 전 서울 미아동 집에 데리고 왔다. 덩치와는 다르게 멍! 소리는 일주일에 한 번 들릴까 말까 하고, 앉아/손/브이를 할 줄 아는 진돗개. 순하고 무던한 성격으로 뒷산에 산책 데리고 다니기 참 좋았던 우리 개는 이제 집 밖에 나가면 위험한 개가 되었다. 엄마는 호돌이를 돌보며 자폐 스펙트럼이나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째, 새벽 4시와 6시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두 번 잠에서 깨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매일을 과도한 불안감으로 깨어 거의 점프하듯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아빠의 출근길을 돕거나, 엄마의 산책을 돕기 위해. 아빠가 출근길에 넘어질까봐, 엄마가 산책길에 호돌이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불안해서. 겁나서. 마치 제 목줄 물어뜯는 호돌이처럼.



그렇지만 나는 내 목줄을 물어뜯지 않기로 했다.



나를 돌보기로 했다. 지금의 이 불안은 혼자서는 감당 불가능하다. 근처 신경정신과에 처음으로 방문해 꽤 자세한 문진과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복용을 권유받았다. 가족을 돌보는 일도, 나를 돌보는 일도 꽤 능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돌봄은 나름 자신 있는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병원에서 선생님이 하신 한 마디는 조금 뼈아팠다. "아라씨는, 기댈 데가 너무 없네."



새벽 6시부터 30분, 길면 50분 정도 산책을 마치고 나면 엄마는 8시 반쯤 출근을 하신다. 그럼 나는 집안일을 조금 하고 작업실로 향한다. 텀블러에 얼음 가득 커피나 보이차를 타서 슬렁슬렁 기분좋게 걷는다. 작업실은 온전히 내가 돌보아야 하는 공간이다. 바닥에 깔 러그, 가구를 고르고, 10분 거리에서 150cm짜리 무거운 전신거울을 당근으로 거래해 낑낑대며 들여다 놓고, 습도가 높은 반지하라 올 때마다 제습기를 2대씩 돌리고, 디퓨저와 인센스스틱으로 향을 입힌다. 쓸고 닦는 것은 기본이다.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취업준비를 하거나 공부를 하다가, 문득 공간을 돌아본다. 음, 구석구석 꽤 마음에 든다. 결국은 여기가 내가 기댈 곳이다. 내가 차근히 만들어 낸 숨쉴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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