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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Sep 25. 2024

육아휴직 29주 차 : 오래 살 수 있는 비결

아빠 육아 : 240812-240818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다. 작년 말 나는 야심 차게 큰 전지 사이즈의 연간 플래너를 샀다. 하나가 모자라 두 개를 샀다. 휴직의 주목적은 물론 육아다. 그렇지만 솔직히 다른 이유로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시간을 핑계로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많은 목표를 세우면 괴로워질 것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욕심이 났다. 연간플래너에 목표를 적어 넣는 칸이 욕망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불퉁거리며 벽에 붙이던 겨울밤이 생각났다.


 그날 밤 책상에 골똘히 앉아 계산했다. 벽을 바라보니 쏟아질 듯 무수한 빈칸들이 모두 내 시간 같았다. 일 년을 52주로 나누고, 한 주마다 달성목표를 세웠다. 하루를 쪼개서 만들 수 있는 내 시간을 추출해 냈다. 해야 될 과업들을 배치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뿌듯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게임 캐릭터처럼 몇 가지 스킬이 장착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올 해의 시간이 접시에 놓인 사과처럼 맛있어 보였다. 군침을 흘리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그 사과는 벌레 먹은 부분도 있었고, 껍질도 생각보다 잘 안 깎인다는 건 먹다보며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만 해도 회사원 냄새가 빠지기 전이었다. 출장 계획표를 짜는 마음으로 휴직을 준비했던 것 같다. 촘촘하고 아름답게 과업을 완수해 가는 즐거운 시간을 상상했다. 복직이 다가오는 지금 회고해 보면 휴직생활은 출장보다는 여행과 훨씬 더 닮았다. 호흡이 길다. 어쩌면 삶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든다. 시작도 끝도 정하기 나름이다. 인생은 레이스라는 말이 어울린다. 일, 월, 연, 시간의 단위에 초조해질 필요가 없다. 올해 연간 플래너에서 지워 버릴까 고민했던 항목들에 다시 스티커를 붙이기로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긍정회로를 돌리고는 있지만, 사실은 계획한 것들의 반도 실천하지 못해서 짜증도 난다. 한 마디로 실패다. 책은 거의 읽지 못했고, 일본어 공부는 스미마셍이다. 새로운 기술은 전혀 획득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신 승리를 해본다. 일 년 간 이것저것 건드려 볼 수 있었음에 의의를 가진다. 직접 해봄으로써 그동안 남이 하기에 좋아 보였던 것과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의 구분이 가능해졌다. 앞으로의 시간 낭비를 줄인 셈이다. 캐릭터의 전반적인 경험치가 상승한 느낌이다. 뭐든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


 물리적 시간과 인지하는 시간, 요즘 그 두 관념의 간극을 느낀다. 사실 시간은 매초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도 눈치 못 채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촘촘한 계획이 늘 실패하는 이유다. 순간순간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밀도 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록해 두면 훨씬 좋다. 캐시 메모리 같은 순간들이 사라지기 전에 잡을 수 있다. 시간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비싼 돈을 주고 시간을 산 올해 내내 시간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시간 보존법 같은 비결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알게 되면 꼭 무료공개 하겠다.







240812(월) : 하원할 때 아기 인형을 어부바하고 아빠를 맞이했다. '육종센'에 장난감 반납을 하고 왔다. 놀이터에서 엄마를 마중했다. 날씨가 덥다.

240813(화) : 등원길에 아빠와 편의점에서 택배를 발송했다. 하원하고선 '까루나'에 갔다. 사장님께 책 선물 받았다. 놀이터에서 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선물 받은 책을 한참 보고 있다. 

240814(수) :  엄마가 아침에 써준 편지를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핑크퐁 전화기를 깜빡하고 어린이집에 들고 왔다. 아빠한테 집에 가져가라고 시켰다. 오후엔 전주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셔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240815(목) :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 형무소 역사박물관에 갔다. '할리스'에서 더위를 식혔다. 행사장에서 태극기를 받아 들고 신나게 놀았다. 낮잠을 자고 선율이, 연서, 규나와 키즈카페에 갔다. 아빠가 데리러 왔다. 저녁밥을 먹으러 연희칼국수로 갔다. 엄마아빠는 처음으로 수육을 주문했다고 한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들어왔다.

240816(금) : 등원을 하면서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 일찍 온 엄마와 '자연사 박물관'에 갔다가 '베지스'에서 완두콩 딜버터 밥을 같이 먹었다.

240817(토) : '꽃 그리는 아이'에 내려가서 커피를 샀다. 오후에는 '플팜'에 가서 가방을 사고, '지구커리'에서 도시락을 받았다. '네스트호텔'로 출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집에 왔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쿨쿨 잤다.

240818(일) : 오늘은 하루종일 집에서 놀았다. 물론 신연중학교에서 운동도 했다. 턱걸이를 10초나 했다. 엄마와 점심엔 크림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





아이처럼 뒷짐지고 천천히 현재를 관망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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