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육아 : 241104-241110
어린아이와 함께 있으면 스마트폰을 보기 힘들다. 사진 찍을 때만 가끔 꺼낸다. 아직 눈을 팔면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중독을 대물림해주고 싶지 않다. 덕분에 디지털 디톡스 중이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아이가 보배 같은 말을 할 때다. 기억하고 싶어 견딜 수 없기에 고육책을 쓴다. 워치를 입에 대고 음성인식 메모를 한다. 물론 이 모습도 아이가 따라 한다. 그렇지만 귀엽다. 누가 안 볼 때 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다. 비밀 요원과 동네 바보의 자태는 한끝차이기 때문이다. 난 물론 후자에 가까우니 더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어렵게 적어둔 올해의 아이가 한 말들 중에 으뜸 삼선을 골라봤다.
“아빠 천천히 조심히 가. 사뿐사뿐. 나 넘어지니까, 아야 하니까 조심히 가”
병원 가는 길에 타려던 버스를 놓칠까 봐 아이를 안고 사력을 다해 뛰어가는 나에게 속삭인 그녀의 말. 말 그대로 빵 터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 뻔했다. 곱씹을수록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정말 기승전결 있는 주옥같은 멘트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하다만 감성보이 아빠는 마음이 시렸다. 그래도 자기 몸을 끔찍이도 아끼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웠다.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갔다 왔지. 좋았지.”
올해 여행을 자주 갔다. 일부러 따지거나 재보지 않고 떠났다. 늘 그렇듯 하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대부분 남이 한 말들 때문이다. '다른 여행자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다는 질타(정말 사력을 다해 조심했다), 부모 좋으라고 아이를 고생시킨다는 걱정(사진 보면 반대다, 해맑은 아이와 광부몰골의 애미애비),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는 비판 등'이 마음의 소리에 남았지만 무시하려 했다. 커서 기억에 남지 않아도 좋다. 지금 이렇게 아이가 기억한다. 그리고 이십사 시간 붙어있었던 온기가 마음속에 남았다.
“아빠랑 같이 걸어가고 있네? (이 길이 오래오래 기억에 많이 남겠다고 혼잣말한 나에게 대답)”
내가 보낸 한 해를 한 장으로 그려달라고 AI머신에게 명령한다면 아마도 등원길 이미지를 내놓을 것 같다. 고사리 같던 손이 어느새 단풍 같아졌다. 그 손을 잡고 여유롭게 걸으며 실컷 해찰했다. 꽃도 구경하고, 같은 자리의 나무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구경했다. 간판도 읽어보고 양옥집에 매어있는 강아지에게 인사했다. 매일 지각이었지만 즐거웠다. 다정한 말도 나누고, 헤어질 때 울지 말라고 다짐도 했다. 엄마에게 응원도 보냈다. 무르팍이 깨져서 몇 주간 마음 아팠던 적도 있다. 아이와 나는 등원길에서 하루하루 성장했다.
이렇게까지 적어두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기억은 무조건 휘발되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의 말은 더 그렇다. 요새처럼 정신없는 나날엔 한 시간 전의 말들도 가물가물하다. 쫑알거리다가 잠들고 일어나자마자 나불댈 정도로 말이 많은 시기다. 작년엔 우는 것 말고는 감정표현을 할 수 없었던 아이의 생각이 무척 궁금했는데 이렇게 얘기해 주니 퍽 고맙다. 그게 어떤 말일지라도 나는 듣는 순간순간 행복함을 느낀다. 마음의 실이 하나씩 더 연결되는 느낌이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만 그건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해본다. 기록하는 만큼 기억된다. 수 천 마디의 말 중 고르고 고른 말이라 더 소중하다.
241104(월) : 아빠수첩과 펜을 가지고 한참 놀았다. 간판을 읽으며 등원했다. 하원하고서는 서촌에 가서 '오프더레코드'라는 전시를 보았다. 퇴근한 엄마를 만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오는 길에 만두를 사서 같이 먹었다.
241105(화) : 기분 좋게 일어나 한참 놀다가 등원. 하원하고선 ‘까루나’에 가서 재밌게 놀다 왔다.
241106(수) : 요즘 계속되는 늦잠, 그래도 좋다. 하원하고서는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타고 놀았다.
241107(목) : 오늘도 킥보드 타고 놀이터. 이제 언니오빠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나중엔 어울려서 놀아봐야지. 엄마가 빨리 왔다.
241108(금) : 하원하고 버스를 타고 엄마회사 앞으로 갔다. ‘봉우리’에서 한정식을 먹고 집에 왔다. 날씨도 좋고 행복했던 저녁시간.
241109(토) : 아침에 일어나 엄마 친구들을 만났다. 데리러 온 아빠와 홍대교정을 거닐다가 다시 엄마를 만났다. 홍대 거리를 구경했다. 엄마아빠가 자주 오던 곳이라 했다.
241110(일) : 안국으로 놀러 갔다. ‘송암온반’에서 밥을 먹고 북촌을 거닐다가 돌아왔다. 가을 하늘이 참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