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
조카가 있다. 7명. 이모 이기도 하고 고모이기도 하다. 내가 본가에 왔다는 소식만 들리면 오빠와 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출동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이모 또는 고모인 내가 있는 그곳으로 온다. 조카들은 나를 만나면 앞다투어 무언가를 건넨다. 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표현 방식인 무언가를 말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따뜻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품을 줄 아는 것은 아이들 뿐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같은 말과 행동을 한다면 그건 다 어른 탓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와보니 고모라는 사람이 있었고, 이모인 내가 있었다. 내가 다만 그들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인사와 포옹과 몇 마디의 말 뿐이다. 그렇게 돈도 안 들고 시간도 안 드는 행위에도 아이들은 바로 다음날 '사랑'하고 '고맙다'는 편지와, 자기의 최선을 다해 만든 선물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아이들은 노는 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쓴다. 그 마음이 도대체 어떤 마음인가. 지금의 딱딱한 뇌로는 짐작조차 쉽지 않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묻.따. 사랑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오로지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사랑에는 의심도 없고 꿍꿍이도 없다.
머리가 커가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아무것도 따져보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은 나도 아주 어렸을 때나 가능했던 것 같다. 조카들의 그런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아도 정말로... 적당한 보답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사랑으로 베푸는 수 밖에는.
11년 차 고모 이모로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이 원하는 사랑은 터닝 메카드도 맞고 핑크퐁도 맞지만 '이 사람이 나를 위해 터닝 메카드를 주는구나', '이 사람이 나를 위해 핑크퐁을 주는구나', 같은..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어떤 마음. 그것이다. 그 무언가가 나처럼 인사라도, 포옹이라도,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일이라도, 거기에 나를 위한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말이다. 아이들은 분명히 그 '위함'의 마음을 안다.
어떤 형태이든 '위함'의 본질이 깃든 사랑이 사랑이다. 아이들이 고모를 '위해' 만든 어떤 것, 이모를 '위해' 쓴 편지처럼, 그 사랑처럼 말이다.
아이들의 따뜻함을 지켜주기 위해 어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른들의 차가움이 제발 아이들에게 옮겨 붙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당 브런치북(과 글들은) 수정을 거쳐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로 독립출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