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관한 단상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장점은 딱 한 가지로, 교통비가 줄었다는 점이다. 출근해야 할 회사가 없는 나로서는 굉장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가던 도서관에 갈 수 없었고 원래 가던 카페가 갈 수 없었다. 집 외의 공간에서 누리던 생산성과 타협해야 했다.
햇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북향의 우리 집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낮에 바깥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터라, 북향으로 집이 결정 났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집의 정체성은 하루의 반 이상을 쓰지 않는 공간에서 매시간을 살아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조용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음이 예사인 우리 집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소음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났다. 생각과 생산이 일상인 사람에게 여간 불만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집에 있는 것처럼 남들도 집에 있어야 했고 우리는 몰라도 되었을 서로 간 소리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집에서 일다운 일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상황은 고역이었다. 기숙사에 살던 고등학생 때는 자습실에, 혼자 살던 학부 때는 도서관에 가야 했다. 홀로 있다는 사실만이 집중력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적당한 개방감과 적당한 공간감 나는 그런 것을 좋아했고 이는 10년 이상을 열 평이 안 되는 곳에서 잠을 자온 사람의 저항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내가 이 모든 불만을 감내하고 집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해내야 한다. 한 날 수업에서 선생님이 "'학부생들에게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서 고작 움직이는 것이라곤 이 방에서 저 방이다'라고 했더니 학부생이 '교수님 저는 요 쪽 코너에서 저쪽 코너로 옮기는 것 밖에 못해요'라고 해서 깨달음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학부생에게 깊이 공감함과 동시에 이 시대의 집은 개인의 주관적 행복부터 사회적 성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과의 근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상황에 한정하면 코로나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이 상황으로 생긴 불편을 언제든지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집에서 재택근무를 해야 하니 방 하나를 뚝딱 서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처럼.
한편 디지털 공간에는 새로운 형태의 집이 생겼다. 누구나 입주할 수 있고 입주 자체에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공지되어 있는 대로 DM을 보내면 의뢰인의 설명에 맞는 일러스트를 그려서 계정을 태그해 포스팅해준다. 피드 한 칸 한 칸이 개인의 집이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입주한 아파트가 된다.
물론 나의 계정으로 대표되는 이 '집'을 꾸미는 건 우리 현생의 재화일지라도, 이 피드에서 이상한 안락함을 느낀다. '펜트하우스'란 없는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 삶에서 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집은 어떻게 서로와 서로의 격차를 보여줄까 나는 그 전부가 궁금해졌다.
해당 브런치북(과 글들은) 수정을 거쳐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로 독립출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