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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언 Sep 21. 2015

과연 이 작품은 진작인가?

작가와 위작의 줄다리기

현대 미술에 있어 예술작품의 제작은 더 이상 작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작품들이 작가의 손에서 직접 창조되고 있지요. 특히 작가만의 고유한 붓터치나 손재주가 들어간 작업이라면, 그 창조자인 작가가 작품의 진위여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진위 여부를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감정기구나 감정가, 혹은 문서나 그 외의 것이 더 중요할까요?

만일 작가가 죽었다거나 의도적으로 부정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과연 작가는 진작과 위작에 있어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뭐가 중요할까?)


여기 위작인 듯 위작 아닌 위작 같은 그림, 진작인 듯 진작 아닌 진작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우선 작가와 위작의 흥미로운 사례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위의 문들에 대해 생각해보지요.


1. 본인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한 데 키리코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큰 인기가 있어 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으며, 그로 인해 굉장히 위작이 많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위작을 만든 사람이 바로 작가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왜???)


키리코는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자신의 진작이라고 보증하며 팔았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후에 그 작품들을 본인이 직접 위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히 작품 구입자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소송 끝에 키리코는 벌금을 물기도 하였죠. 


이 경우는 작가가 자기 작품을 보고 그리는 자가 복제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그린 완벽한 위작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복제품이 작가의 정신과 영혼이 담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사위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카소는 이 같은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고 말했습니다.


키리코 경우는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하였으나, 오히려 진작으로서의 근거가 너무나 명확하여 진작으로 남아있게 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위작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 앤디 워홀

이 사건은 앤디 워홀의 작업장인 ‘팩토리’의 직원 중 한 명이 앤디 워홀의 이름을 사칭해서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하여 몰래 팔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워홀의 대처 방식은 진작과 위작의 경계를 일순간에 허물어 버렸습니다. 역시 앤디 워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처능력이었지요.


당시 자기가 제작하던 스타들의 초상화보다 직원의 작품이 더 나은 것을 본 워홀은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팩토리에서 제작한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높은 가격에 판매했습니다. 이는 작가가 직접적으로 작품 제작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이 만들어진 목적이 위작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위작이 진작이 된 경우입니다. 

(내 이름은 앤디 워홀, 자본주의의 총아지!)


이 경우는 작가가 본인의 작품이 아닌 것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 한 키리코의 경우와는 다르게 작가의 발언으로 인해 위작이 진작으로 변한 경우이지요. 작가가 한 말로 인해 위작을 진작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위의 사건과는 정말 완전히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가가 위작이라고 한 작품을 진작이라고 한 천경자와 국립현대미술관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 가운데 천경자의 <미인도>라는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에 전시되면서 시작됩니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현대미술관측은 ‘진품이 맞다’고 맞섰습니다. 그리고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전문가 집단인 한국화랑협회는 진품 판정으로 현대미술관측의 손을 들어 주었지요. 이에 화가는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느냐’며 절규했지만 화랑협회는 당시 68세였던 화가의 나이 탓을 들며 ‘작가가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쇠해 자신의 작품을 몰라 본다’며 그녀의 주장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천경자는 화가로서의 인생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99년 고서화 위조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이 ‘천경자의 <미인도>는 내가 위조했다’라고 진술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검찰은 3년인 미술품 위조사건 공소시효가 끝났다며 수사를 하지 않았고 국립현대미술관측과 화랑협회는 진품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경우 위작자까지 나와서 증언한 위작을 위작이라고 말 한 작가의 언질이 완벽하게 무시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작가와 위작자까지 나온 이 작품을 작가의 노화를 이유로 들며, 여전히 진작으로 보고 있다.



어떻습니까? 작가와 전문가의 견해가 서로 맞설 때, 우선 어느 쪽을 존중해야 할까요?


천경자의 작품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시비와 키리코의 자기 복제 사례를 통해서 보았을 때, 상황은 대체로 전문가들의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펼쳐져 온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이 진작이든 위작이든 상관없이 작가가 진작이라고 하면 크게 문제없이 작가의 말을 듣고 진작이라고 하며 넘어가는 사건이 있는 반면에, 작가가 위작이라고 하면 큰 문제가 생기며  그때 작가의 발언은 강하게 묵살되게 됩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 한 사례들 만을 가지고 작품의 진위여부에 있어서 작가 개입에 대한 모든 사례가 이러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지만요.


그러나 어찌하여 진작이든 위작이든 그 진정성을 벗어나 ‘진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여지며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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