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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언 Sep 27. 2015

반가사유상을 사유하다

10년 만에 다시 한 자리에서 만난 두 국보

이번 9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0년 만의 특별한 재회가 이루어집니다. "고대 불교조각대전-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전에서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만이야!!)


두 불상은 국내 불교조각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며, 평소에는 국립중앙박물관 3층의 특별 전시실에서 교대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오직 그 전시실에는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만이 전시되고 있지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불교조각상인 것입니다.


사실, 실제로 보면 아름답습니다. 정말로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미학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정말 정점을 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외에는 나올 수 없는 상이기에 우리의 역사와 민족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역사와 민족성이 녹아있을까요?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좌)국보 78호 (우)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먼저, 반가사유상은 왜 반가사유상이라고 불리는 걸까요? 이는 불상의 형태와 관련된 것입니다. 반가사유상은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올려서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있는 자세를 특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손을 들어서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형태를 반가(半跏) 양식이라고 부르며, 두 번째 형태를 사유(思惟) 양식이라고 부르기에 이를 합쳐서 반가사유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반만 앉아서, 생각한다. 그래서 반가사유!!)


이러한 양식의 불상은 일찍이 인도나 중국에서 우리보다 앞서 유행하였는데, 간다라(현재 파키스탄 북서부)마투라(현재 인도 북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불상 조각들 가운데 반가사유상이 있었습니다. 이 불상들이 다시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에 들어와 동아시아 각지로 퍼진 것이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인 서기 6,7세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반가사유상은 처음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태자(太子)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행을 하면서, 나무 아래에서 인생무상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겼던 당시의 모습이라고 전해집니다.

(이, 인생무상...)


이 태자상은 중국으로 들어오고난 후에도 역시 같은 태자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사유하는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태자사유상이 북제와 북주시대에 많이 만들어지다가 점차 나무의 표현이 사라지고 독립된 형식으로 만들어져 반가사유상으로 정착되어 한국과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미륵보살상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선 반가사유상이 태자상으로 조성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도, 중국과는 다른 한국 반가사유상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인 6세기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는데요. 이는 삼국 시기에 통일과 관련된 당시의 미륵신앙과 관계가 있습니다. 


미륵보살은 사람과 가장 인연이 가까운 보살이면서 부처인데, 현재 도솔천에 있는 보살이지만 다음 세상에 오셔서 3회의 설법으로 온 중생을 제도해 주실 부처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6-7세기경은 나름대로 삼국시대가 통일 신라로  마무리되는 시점인데요. 역사적으로 외형상 전란은 그치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 많이 남아있고, 현세에 지친 민심들이 내세의 희망을 찾아 옮겨가는 시점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특색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원하게 되는 상황이 되게 되며, 여기에 가장 걸맞은 부처님이 미륵보살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 무렵에는 수많은 국보급 미륵보살상이 조성되고 금산사, 법주사, 관촉사, 미륵사, 정림사 등의 사찰들이 건립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신앙적 특색에 따라 미륵상이라고 추정되는 반가사유상의 조성이 그 시기에 활달하게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중국의 경우 반가사유상이 많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신대 이하의 흙으로 빚은 소조불이나 석불이 많으며 금동불로는 20cm 미만의 것들이 적게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후반 1m에 가까운 대형의 금동불이 제작되었습니다. 국보 78호, 83호의 금동 반가사유상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를 보아 우리나라는 중국 미술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왔으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더욱 발전시켜 완성하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 뛰어난 민족, 자랑스러운 한민족)


한국식 반가사유상은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요. 일본서기에 나오는 돌미륵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6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전달되었고, 해방 뒤 일본 대마도에서 발견된 반가상의 하반신, 나가노현 관송원 신사에 신주로 봉안되어오는 동제 반가사유상 등이 그  예입니다.


광륭사의 목조 반가사유상


특히, 일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의 경우 신라의 작품으로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근거로 일본 국보 1호인 이 불상은 여타의 일본 불상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색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특색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은 모두 히노키(노송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 불상만이 적송을 사용하고 있다.

2. 제작기법의 차이가 있다. 일본의 초기 반가사유상은 나무의 외피로부터 내부를 향하여 조각하는데 이 상은 나무의 목심에서 조각을 시작하고 있다.

3. 광륭사 불상은 나무 한 토막에서 그 전체를 조각해낸 것이다. 그 당시의 일본에서는 이만한 불상을 만들자면 몸의 각 부분을 여러 개의 나무로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으므로 차이가 난다.

4. 일본서기나 광륭사의 관계 기록에서 보아 623년 신라에서 다른 불구들과 같이 일본에 보낸 불상이라고 추정된다. 게다가 광륭사의 창건주인 하타 카와카즈는 신라계의 호족이었다는 사실이 있다.


일본 광륭사 목조 반가사유상 수복 전/후 비교 사진. 확실히 수복 전의 모습은 우리 국보83호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똑같잖아! 앙?!?? 똑같잖아!!!)


불교가 정말 번성할 때는 그 평안함으로 인해 구세불이 필요하지 않고, 불교가 외압에 의해서 너무 쇠퇴할 때에는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리는 등의 종교적 예술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6-7세기경에는 불교가 사상적으로는 황금기였지만 실제로 민생은 그리 건강하지 못했겠지요. 이러한 사상적, 문화적 기반이 현실 민생에 대한 사려를 담아 나온 조각반가사유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반가사유상은 당시 한반도의 특색을 담아 한반도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유일무이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반가사유상 가운데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국보 78호와 83호의 10년 만의 만남. 여러분들도 절대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놓치시면 또 10년, 혹은 그 이상을 기다리셔야 할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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