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퇴사 후 고민
밥 잘 주고 돈 잘 주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다시 학문의 길을 선택한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회사에서 주는 월급에 그새 길들여져 있던 상태였다. 코시국 때 잠시 휴업을 하면서도 국내 대학원에 진학을 준비한 적은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마음속에서는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 때문에 채용을 줄인다 뭐다 해서 한창 취업시장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고, 그냥 다니던 회사 열심히 다니자며 나를 다독이는 것으로 나의 첫 시도는 그렇게 짧게 막을 내렸다.
그런 나에게 퇴사는 배수의 진이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매일 속에서 나의 의지는 금방 나태해지기 일쑤였고, 그저 유학 관련된 영상만 한없이 찾아보기 시작하며 두려움만 쌓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퇴사 당시에는 '유학을 가겠다'라는 뚜렷한 계획이나 목표조차 없었던 상태였다. 그저 내 인생이 이대로 계속 흘러가게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강한 감각뿐이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놓은 인생에 갇힌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이 불황에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며 그런 불평은 사치이고 기만이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나조차도 내 편이 아니었던, 겉만 번지르르해 보였던 나는 속으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찾기까지는 퇴사 후 몇 달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남들을 보면 척척 인생을 잘 살아나가는 것 같은데, 나만 이 모든 걸 버겁게 느끼나 싶기도 했다. 정말 많은 한국의 학생들, 직장인들이 그렇듯 공부도, 입시도, 취준도 정말 열심히 했고 돈도 열심히 벌고 또 모아 왔는데, 이게 다 뭘 위한 건가에 대한 목표가 희미해지다 보니, 가슴을 꽉 막는 답답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유별나게 굴지 말라고 내가 나를 채찍질하는 건 덤.
무수한 자책과 고민의 굴레 끝에서, 나는 결국 내 인생을 가지고 뭘 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나는 유학을 가고 싶었다. 그리고 문과생으로서 항상 느끼던 어떤 '하드스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유학이 인생의 답이 될리는 만무하지만 도약점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다시 한번 타국에서 내 삶의 터전을 닦아나가고 싶었고, 유학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훌륭한 발판이었다. 항상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의문과 두려움으로, 나는 그 길을 스스로 막아내고는 했다.
"학비가 너무 비싸", "모아놓은 돈 다 까먹어야 되잖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넘쳐나", "영어가 되겠어?", "공부에 손을 뗀 지 너무 오래됐어", "나는 문과잖아" 등등.
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이유만 주구장창 늘어놓자, 나는 점점 더 위축되어 갔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버젓이 있는데도 온갖 핑계들로 덮어가면서, 나와의 불편하고도 솔직한 대화가 단절되어 가던 시점. 딱 그 시점에 나는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하고 방황을 하던 시기에, 나는 유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영어 점수를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면서도, 인도네시아 발리로 훌쩍 날아가 2달의 시간을 보내다 왔다. 그 모든 과정은 이전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리며 녹여왔지만 핵심만 말하자면, 그 기간 동안 나는 나에게 항상 답하기 어려웠지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남들의 눈치를 얼마나 많이 보면서 살았는지 깨달았고, 내가 원하는 건 솔직하게 인정하는 법을 배웠고,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를 구체화했으며, 내가 왜 그토록 새로운 도전 앞에서 자신감과 자기 확신이 부족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또한 나이 앞에서 내가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이제 결혼할 나이다, 돈 모아서 집 살 나이다, 조금 있으면 과장을 달 나이다, '안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나이에 대한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있는 수많은 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이대로 살아갈 것이냐, 인생 몇 살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언제든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용기를 가져도 되느냐. 그리고 과연 '안정적'인 삶이라는 게 존재하는가라는 의구심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인생은 변화무쌍한 거 아닌가. 그 변화에 자꾸 나를 노출시키고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나가야지, 변화를 계속 피하고 그걸 '안정'이라고 착각하면서 속으로는 계속 불안해하는 건 진정한 안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내가 발리에서 보낸 시간은 용기와 자기애를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것만이 정답 같았던 삶에서 눈을 돌려보니, 다양한 삶의 방식을 택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계속 다니든, 퇴사를 하든, 유학이든 그 무수한 삶의 방식들 중 하나일 뿐임을 새삼 깨달았다. 나에게는 지금 이 선택이 굉장히 나의 궤도를 벗어난 거 같고, 굉장히 과감한 결정 같지만, 멀리서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사실도. 그냥, 내가 항상 꿈꾸며 하고 싶어 하던 일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뿐이었다. 딱 그뿐이었다.
"잘못된 걱정과 예측은 두려움만 낳을 뿐이다". 세계적인 마케팅 구루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세스 고딘의 말이다. 나는 온통 잘못된 걱정과 예측으로 내가 만들어낸 두려움 속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에 발목 잡힐 시간에 일단 준비를 시작하면 뭐라도 될 거라는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8개월 간의 준비 끝에 나는 총 3군데의 미국 대학교 공대 대학원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고, 29세의 나이로 미국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내가 어떻게 유학을 준비를 했는지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과 곁들여 그 과정에서 나의 심경 변화와 생각들을 담아내고 싶다. 내 나이 곧 서른, 나는 유학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