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형 인재라는 말은 되게 많이 들어봤는데요
당연히 된다. 문과생도 공대생이 될 수 있고, 이과생도 문과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육구조와 취업시장은 비교적 경직되어 있는 편이고, 전공 간, 직무 간 이동이 제한적인 편이다. '융합형 인재'를 강조하지만, 그 '융합형 인재'가 나오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전에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대화를 트게 된 미국인 대학생 여자애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으로 미디어 공부를 하러 가는 학생이었다. 흥미가 생겨 깊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전공을 총 4번 바꾼 학생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인문학 전공이지만, 경영학, 데이터 분석학, 경제학 전공을 거쳐, 지금은 자신이 관심이 생긴 미디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와 콘텐츠에서 강세를 보이는 한국에서 미디어를 공부하고 싶어 잠시 휴학을 하고 3개월 간 한국에서 어학당을 다니며 겸사겸사 미디어를 공부할 거라고 말했다. 우선 대학생 때 그렇게 많은 전공과목을 탐색해 볼 수 있다는 사실과, 얼마든지 전공을 변경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런 선택의 자유가 부러웠다.
미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전공을 변경하는 것은 물론, 전공한 직무와 완전 다른 분야로 이직을 하는 비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미국 교육통계센터(NCES)에 따르면, 미국 학부생 중 약 30%가 입학 후 첫 3년 이내에 전공을 한 번 이상 바꾸며, 그중 약 10%는 학사 과정 동안 두 번 이상 전공을 바꾼다고 한다.
초기 선택이 진로와 맞지 않거나 학업 과정에서 새로운 흥미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공변경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당연한 일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잘 맞는 전공, 더 흥미가 가는 전공이 생기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고등학생 때 흥미나 전망을 보고 선택한 전공을 4년 내내, 그리고 나아가서는 졸업해서 취직을 할 때까지 붙들고 가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선택지가 아닐까 싶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명문 주립대 UCLA의 자체 통계에 따르면, 대학교 학부생 당 평균 4년 동안 2.1번 전공을 바꾼다고 한다. 문과 쪽 전공학생들이 이과 쪽으로 전공을 바꾸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한국에 비해 꽤 흔하다고 한다. 미국은 애초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부터 문과와 이과 구분을 명확히 나누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 상대 분야로 전공을 바꾸는 것이 한국에 비해 수월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영어와 글쓰기를 좋아해서 문과를 선택한 케이스다. 물론 수학을 싫어해서 문과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어린 나이부터 자기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정하는 건 굉장히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걸 빨리빨리 정해야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렇게 전공분야는 사실상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명확하게 나뉘고, 이는 교육과정의 큰 차이를 만든다. 이과생들은 수학, 과학은 심도 있게 공부하지만 철학과 역사, 인문사회 과목은 '안 해도 돼, 시험에 안 나와'가 돼버린다. 문과생 또한 마찬가지로 또한 국어, 영어, 제2 외국어와 역사 등은 깊이 들어가지만, 물리, 화학, 생물, 지수, 미적분과 벡터와 같은 심화 수학은 손을 놓다시피 한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다른 과목을 탐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개개인의 흥미에 따라 공부를 할 수야 있겠지만,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시험에 안 나오니까 공부 안 해도 돼"의 굴레는 대학에 가서 "취직에 도움 안 되니까 공부 안 해도 돼"의 굴레로 계속된다. 이과생들은 철저히 이과 과목들을, 문과생들은 철저히 문과 과목들을 이수하게 되는데 물론 이때도 학생이 교양과목이나 부전공 등을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학제 간 융합 교육을 실천할 수는 있다. 다만 그게 '필수'의 영역이 아니라 '굳이'의 영역에 있다는 점.
전과의 기준이 엄격하고, TO가 빡빡하게 정해져 있는 상황에 더해, 일찍부터 진로를 결정하고 안정성을 중시하는 문화적 요인 때문에 전공 변경의 비율 또한 현저히 낮은 편이다. 2019년 잡코리아 설문조사 결과, 대학생의 약 40%는 다른 전공으로의 전과를 희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전공을 변경한 비율에 대한 통계는 명확히 집계되지 않은 상황이다. 전공을 변경할 수 있는 기회는 고학점을 기록한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대부분 복수전공, 부전공의 선택지가 현실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뉜 교육과정은 결국 졸업 후 직업 선택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해 교육하는 건 놀랍게도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고 한다.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눠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를 채택하였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 한국 대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단다. 더군다나 이 제도는 학생을 위한 제도가 아닌,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능인을 키우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과목의 교육을 하지 않음으로써 교육 비용을 아껴보려는 시도였다고. 당연스럽게도 문·이과를 구분하는 교육은 학생의 진로를 제한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문과생이 공대생이 될 수 있는 방법이야 있지만, 학부생 때부터 그렇게 과를 이동하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유연성이 많이 떨어지다 보니, 이것 또한 학생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큰 도전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말이 길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문과생인 사람으로서 공대가 굉장히 높은 벽으로 느껴졌고, 긴 시간 동안 감히 전과를 할 엄두를 못 냈다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이과 사이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나 또한 그중 하나가 되려 하는 과정에 있다. 원래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진짜 안 되는 거고, 된다 된다 하면 진짜 되는 거다. 그리고 남들이 '어렵다', '힘들 거다'라고 말하는 걸 직접 해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인생에 재밌는 거, 배우고 싶은 거가 얼마나 많은데, 나부터가 나 스스로에게 굳이 한계를 그어놓고 살지 말자는 소리를 이렇게 길게 해 봤다.
관련자료 출처
1. 식민지의 두 문화... 문과와 이과의 차별, 더 칼럼니스트
2. 대학생 10명 중 4명 "'전과' 하고 싶어"… 방황하는 '대 2병'도 64%,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