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경험하는 베뉴 - 미술관, 경기장, 공연장, 테마파크, 쇼핑몰
공공건물이나 체육관, 극장, 공공 광장 또는 물이 흐르는 분수를 담고 있지 않은 건축단지에 도시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가?
-파우사니아스, 2세기
인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란 키워드로 통찰을 주는 베뉴가 박물관이라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을 벗어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베뉴들은 미술관, 공연장, 경기장, 테마파크와 같은 장소들이다. 세계적 공간 연출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미쿤다는 그의 역작 '제3의 공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상을 벗어나 영혼의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제3의 공간이라고 명칭 하였다.
삶이 허전하고 팍팍할 때,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평안과 휴식을 얻으려 각자의 장소를 방문한다. 누군가는 미술관의 그림들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떤 이는 공연장의 실내악 앙상블을 들으며 위안을 얻고, 또 다른 이는 쇼핑몰의 몰링을 통해서나 테마파크에서의 오감 짜릿한 스릴로 삶의 고단함을 덜어낸다. 이렇게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베뉴들은 집과 사무실을 벗어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3의 공간이라는 콘셉트로 다가가 휴식과 위로를 건네준다. 그렇다면 각각의 장소들은 어떠한 특징과 기능들을 할까? 하나씩 살펴보자.
박물관이 기억을 통해 삶의 통찰을 제공한다면, 미술관은 시간을 아우르는 예술을 통해 삶을 생각하게 한다. 하얀 벽 때문에 '화이트 큐브'라고도 부르는 미술관은 그림,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주제로 전시회를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이다. 과거의 미술관은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미술품의 보존과 전시를 통한 교육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미술관에 오락과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이 추가되면서, 더 이상 지루한 액자형 전시가 열리는 곳이 아닌,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바로 이러한 전통적 미술관을 탈피하고 전방위적 소통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경기장(Stadium)은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스포츠 경기를 위해 지어진 시설을 모두 통칭하여 쓰는 용어이다. 대게 시설 중앙에 선수들이 경기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들어서고, 그 주위를 계단식 형태의 관객석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가 많다. 거의 대부분의 경기장은 민간 투자가 아닌 국가나 지자체가 투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부분 국민이나 지역 주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체육시설로서 공공의 가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과거 경기장은 오직 원래의 스포츠 경기만을 위한 시설이었지만 최근 경기장들은 콘서트, 기업행사, 대형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유치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은 설계 당시부터 마트, 영화관 등을 동시에 유치하여 경기장이 아닌 복합 여가공간이라는 비전을 앞세워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베뉴로서 음악회, 무용, 연극, 뮤지컬 등 극장 예술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보면 된다. 객석이 있고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있는 형태를 띤다. 예술의 전당이나 지자체별로 있는 아트홀 등이 대표적인 공연장의 형태이다. 공연장 역시 정부나 지자체가 직접 출자하여 건립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에는 기업들이 메세나 활동의 일환으로 문화공연장을 건립하여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LG아트센터가 가장 성공적으로 기업이 운영하는 경우이며, 문화 공연뿐 아니라 국제회의나 기업행사 등 다양한 행사 유치를 위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
디즈니랜드, 에버랜드 등 대형 부지 위에 다양한 테마의 놀이시설, 정원, 식음시설, 쇼핑 공간 등을 복합적으로 설치하고 관람객에게 환상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베뉴를 말한다.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지자체들이 늘 우선적으로 꼽는 기반 시설이 바로 이 테마파크이다. 테마파크는 기획부터 건립, 운영까지 최소 1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며, 투자 금액 및 운영비 또한 조 단위가 들어가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종합적 마스터플랜이 수립되어야 가능하다. 역설적으로 기획단계부터 실제 운영할 때까지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므로, 그 사이에 여가 트렌드가 바뀌거나 경쟁 시설이 건립될 경우 심각한 적자가 예상될 경우도 있다.
쇼핑몰은 한마디로 쇼핑을 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백화점이나 마트 등 기존 유통시설과는 다르다. '몰(mall)'은 쇼핑, 식음, 문화, 휴식 등의 시설을 한 곳에 모아 방문객의 편의성을 극대화한 장소를 말한다. 그래서 '몰링(malling)'한다고 할 때는 한 장소에서 위의 다양한 활동을 모두 한다는 것으로 최근 쇼핑 트렌드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롯데몰, IFC몰, 스타필드 등 최근 유행하는 유통 시설들은 모두 이런 몰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잠실 롯데월드 몰은 미술관, 공연장, 아쿠아리움 등 기존 몰에서 볼 수 없었던 시설들을 모아놓았는데, 이것은 결국 관람객의 체류시간을 늘려 소비를 확대하려는 전략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나 롯데월드타워 7-8층에 위치한 롯데 뮤지엄과 콘서트홀은 기존 쇼핑몰의 개념을 좀 더 고급화하여 타 지역 대비 고급 복합 문화공간으로서의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미술관, 공연장, 경기장, 테마파크, 쇼핑몰 등 현재의 삶을 살며 머무는 베뉴들은 모두 본래의 기능만을 추구하지 않고 다양한 기능들을 더해 복합적인 소통과 교류의 장소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나 이런 베뉴들은 도시의 생활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에 일상의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도 일상을 벗어난 체험이 가능하도록 하여 바쁜 도시 속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주고 있다. 최근 트렌드로 자리 잡은 공간 마케팅의 개념도 이러한 콘셉트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쇼핑을 하면서도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어찌 보면 효율의 극치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미술관이 쇼핑몰에 들어옴으로써 조금 더 가까이 우리 삶에 위로가 다가오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