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카스테라를 삼키는 마음

삼키는 법을 배운다는 것

by 김이후

소년은 현관 앞에 주저앉아 신발을 걷어찼다. 유치원에 보내달라는 투정은 곧 비명이 되어 좁은 집안을 메웠다.

엄마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다가 노란 카스테라 한 봉지와 우유 한 팩을 내밀었다.

​소년은 갈림길에 섰다. 더 울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달콤함을 수용할 것인가. 아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빵 봉지를 뜯었다. 퍽퍽하지만 달콤한 카스테라를 입안 가득 욱여넣으며, 아이는 먹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종종 그 어린 날의 선택을 복기한다. 그것은 그의 생애 첫 '차선책'이었다.


살다 보면 유치원 가방 대신 노란 빵 봉지가 주어지는 날이 더 많았다. 나에게도 그런 카스테라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맞지 않는 회사 생활을 견디게 해 준 동료가 있었다. 퇴근 후 카페에 마주 앉아 상사를 씹고 회사 불만을 토해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낙이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내 마음의 무게 추는 '동료'에서 '연인' 쪽으로 조금씩 기울었다.

​어느 겨울밤, 밤 10시가 넘어 카페를 나섰을 때 세상은 함박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말없이 내 목도리를 풀어 그녀의 목에 감아주었다. 하얀 눈밭 위로 로맨틱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적어도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의 나는, 우리가 어제와는 다른 사이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일주일 뒤, 그녀는 목도리를 돌려주며 말을 꺼냈다.

"우린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내 인생에 던져진 '카스테라'였다는 것을. 연인은 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친구로 곁에 남으라는 삶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 퍽퍽한 빵을 삼킬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했기에, 내밀어진 손길을 무시한 채 그녀를 밀어내고 부담을 주었다.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 내가 그 빵을 울면서라도 삼켰다면, 적어도 그녀라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힘든 시절을 함께 해준, '연인'이 아니어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나는 그렇게 잃었다. 최선이 아니면 전멸이라 믿었던 오만이, 내 곁의 소중한 차선책을 앗아갔다.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내가 바랐던 ‘최선’은 자주 빗나갔다. 공기업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나는 드디어 인생의 화려한 유치원에 입학한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펼쳐진 현실은 연고 없는 지방의 적막함과 반복되는 일상이 담긴, 또 다른 종류의 퍽퍽한 카스테라였다.


​​​그 퍽퍽한 시간을 꾸역꾸역 삼켜낸 뒤에야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지방 중에서도 가장 시골의 그 적막함 속에서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내일 입을 셔츠를 다려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그때 익힌 생활의 근육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치 않을지 몰라도, 예상치 못한 균열이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삶의 뒤틀림 앞에서도 나는 이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비결은 별게 아니었다. 그저 맛없는 빵이라도 끝까지 씹어 삼키는 법을 익혔을 뿐이다.


​그때 그 우회로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소중한 인연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가는 단단한 마음 역시 갖지 못했으리라. 결국 차선책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나를 예상치 못한 성장의 기회로 안내하는 숨은 통로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기꺼이 카스테라를 먹으려 한다. 목이 메어 우유를 들이켜야 할지라도, 눈물 섞인 빵을 씹어 삼켜야 할지라도 말이다. 이 퍽퍽한 시간 또한 언젠가는 나를 살게 했던 선택으로 남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전에 쓴 ‘카스테라를 먹었다’라는 기록에서 이어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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