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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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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회고록 8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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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10.19)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여수에 주둔했던 14 연대의 소수 장교에 의해 일어난 반란이었다. 공산계열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라고 했다. 이를 소탕하러 갔던 광주 4 연대가 합세하여 전라남도 북도 지방이 혼란에 빠졌었다. 국군의 진압작전으로 지리산으로 도주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내 나이 18세 때라 반란이 무엇이고 내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또 우리 고장에는 피해가 없었고 살기에도 바쁜데 그러한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음 해인 49년의 봄이었다. 몸이 나른해지고 일은 하기 싫고 엉뚱한 공상만 하게 된다.


 평리에 박군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아다. 무슨 바람에서 나와 둘이 무작정 가출하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날에 옷봇짐을 싸들고 가족들 모르게 나와 광주행 버스를 탔다. 어떠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떠난 것이다. 오후 늦게 광주에 도착했는데 처음 가본 곳이라 어데가 어데인지도 모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우리 몰골을 쳐다보니 도시사람과 비교해 보니 한심했다. 나는 일본에서 입고 온 학생복에 운동화였고 박군은 흰색 목면한복에 고무신을 신었고 옷봇짐을 들고 다니니 시골티가 완연하다. 땅거미 칠쯤이라 배도 고프고 해서 우선 잘 곳을 찾아야 했다. 골목길인데 여관이라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우선 들어가고 보자 하고서 들어갔다. 사실 우리 주제에 여관은 과분했다. 수중에 돈도 별로 없어 합숙소나 찾아봤어야 했는데 일단 들어갔으니 되돌아 나올 수도 없고 해서 방을 달라고 했다. 우리 행색을 보니 만만했던가 보다. 구석방을 안내해 주는데 방이 퀴퀴하니 손님에게 주는 방이 아니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자는 방 같다. 그러나 촌놈들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들어갔다. 옷봇짐을 내려놓고 마당 수돗물에서 씻고 있으려니 저녁식사가 들어왔다. 반찬은 서너 가지인데 종일 굶었으니 그 짠 멸치젓갈까지 남기지 않고 개(犬) 밥그릇 핥듯이 다 먹어치웠다. 이불도 꾀죄죄했지만 덮고 일찌감치 드러누웠다. 그날 숙박비가 한 사람당 1,800원, 후회한들 소용없는 것, 지참금에서 반이상이 축났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여관에서 나왔다.  광주역으로 가서 개찰구로 통하지 않고(차표를 못 샀기 때문에) 화물차가 드나드는 곳으로 해서 숨어 들어갔다. 여수행 열차에 올라탔다. 그 당시에는 급행 완행이라고 구분이 없었던 것 같다. 역마다 정차했다. 차장이 저만치에서 차표검사 하러 오면 변소 간에 들어가 숨어서 면했다. 열차가 저녁때쯤 여수역에 닿았다. 내릴 때도 출구로 나가지 못하고 반대방향에서 내려 철로를 한참 걸어 나와 밖으로 나왔다. 반란사건 후 반년도 채 못되었으니 불탄 건물이 여럿 보였다. 저녁때가 되었으니 밥도 먹어야 하고 잠잘 곳도 구해야 했다. 뒷골목으로 가보았다. 하숙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어두워지니 서둘러 그 간판이 붙어있는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1박 2식에 500원이란다. 광주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종일 굶었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500원씩 내고 지정해 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도 해서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누워버렸다. 조금 있으니 밥상이 들어왔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니 살 것만 같다. 서로 얼굴만 쳐다보니 할 말이 없다. 옷도 벗지 않고 누웠다.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공상만 하는 것이다. 집 떠나온 것을 후회도 해보기도 하며. 수중에는 몇백 원이 남았었다. 당장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하다. 어찌하다가 잠이 들었고 깨어보니 아침이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아침밥을 얻어먹고 하숙집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부두 쪽으로 발을 옮겼다. 누가 반겨 맞아주는 이 없는 곳인데도 선창가에 가보았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데 우리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 부둣가에 일할 것이 없나 하고 돌아다녀 보았지만 누구 하나 일하자고 하는 사람 없다. 모래사장에 앉아 갈매기 날아가는 것만 바라보다가 한숨만 쉬는 것이다.


 무거운 발길로 역전에 와서 보니 오래전부터 살았던 정들었던 곳처럼 누구 반겨주는이 없는데도 종일 굶고 돌아다녔으니 피곤도 하고 시장기가 들어 술집에 들어갔다. 막걸리 한 사발을 들고나니 살 것 같다. 이제 돈도 떨어졌고 하숙집마저 들어갈 형편이 못된다. 술집아주머니에게 잠만 잘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역 앞에 가면 합숙소가 있단다. 하룻밤 자는데 100원씩 주고 잘 수 있단다. 어두워지니 서둘러 찾았다. 지붕이 낮고 판자로 지은 담도 없는 허름한 집이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대 여섯 사람이 누워있는 사람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를 쳐다본다. 희미한 촛불아래 마치 걸인들의 방 같았다. 용무가 무엇이야 하는 것 같다. 하룻밤 잘 수 있느냐고 물었다. 100원씩 내고 자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 자고 가겠다고 했더니 들어오란다. 신을 벗어 방구석에 놓고서 집주인인듯한 사람이 일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주인이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100원씩 내주고 한구석에 앉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족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이란다. 나름대로 화투 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각기다. 옷맵시나 얼굴을 보니 꾀죄죄한 몰골이 우리도 걸인들과 다를 바 없다. 낮에는 구걸하다가 밤에는 이곳에 와서 돈 내고 자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 자신 몰골이나 옷주제도 별 수없으면서 그들을 마음속으로 비평을 했으니 한심하다. 박군은 무명베로 지은 한복을 입었으니 소매 끝과 무릎, 궁둥이 새까맣게 되어있으니 그들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다행히 검정옷이라 때 묻은 표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끼니는 거르지 않고 사는데 우리는 오늘 저녁밥도 거른 상태가 아니냐. 그중에서 한 사람이 유난히 깨끗하게 한 3~40대쯤 돼 보인 사람이 우리에게 자꾸만 시선이 왔다. 그런데 그분이 밖으로 우리를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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