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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7. 2023

가출 2

할아버지 회고록 9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가출 2  



 그중에서 한 사람이 유난히 깨끗하게 한 3~40대쯤 돼 보인 사람이 우리에게 자꾸만 시선이 왔다. 그런데 그분이 밖으로 불러냈다. 나이는 몇 살이며 어떻게 무엇하러 이곳에 왔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자초지종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딱하고 한심스럽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굶었으니 배가 고플 것이라며 자기 집으로 가잔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못 이긴 척 따라갔다. 역 앞 옆에 공터에 직경 1m쯤 되는 토관이 즐비하게 깔려있었다. 그런데 그 토관 속으로 들어가면서 따라 들어오란다. 우리는 추춤한 수밖에. 서있으니 빨리 따라 들어오라는 것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토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토관을 두어 개쯤 지나니 옆으로 꼬부라져 들어가니 희미한 촛불아래 젊은 여자가 보였다. 인사를 하는데 부인이란다.


 안에는 토관이 길게 뻗어있고 이불도 있고 취사도구도 있었다. 집이 없어 이곳에서 살림을 하는구나 싶었다. 어서 밥을 지으라고 부인에게 시켰다. 동글한 토관바닥에 판자를 깔고 담요를 깔아 평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키 큰사람은 천정에 닿을 것 같은데 나는 키가 작아 닿지는 않았다. 바삐 밥을지어 밥을 수북이 밥그릇에 담아 상에 차려 김치랑 국이랑 내놓는데 염치불고하고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나니 고맙고 부럽고 미안했다. 우리에게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타일렀다. 차비가 없으면 옷보따리 맡겨놓고 빌려줄 터이니 그렇게 하란다.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합숙소로 다시 가자니 그분이 그곳에 와있을까 봐 가지도 못하고 다른 토관 속에 들어가 찬바닥에 누웠다. 배가 부르니 춥지도 않았다. 토관 속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일어나 토관에서 나와 또 부두로 나갔다. 어젯밤 늦게 저녁밥을 많이 먹었으니 아침까지도 든든했다. 이곳저곳 다니다 선창가로 지나가는데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다름 아닌 고향동리에 사는 모친의 외가친척되시는 분(아저씨)을 타향인 이곳 여수의 선창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웬일이냐고 나를 붙잡고 물으신대 할 말을 잊었다. 한참 후에야 자초지종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시장할 것이라 하시면서 길옆에 있는 국밥집으로 나를 데려가신다. 국밥을 하나 시켜주셨다. 밖에 서있는 박군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국밥을 먹었다. 배가 부르니 밖에 서있는 박군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밖에 친구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나를 타이르신다. 이곳은 너 있을 곳이 못되니 집으로 가라 하신다. 노자가 없으면 꾸어줄 테이니 가지고 가란다. 그러면서 2,000원을 내주셨다. 얼떨결에 받았다. 가서 아주머니(부인)에게 갚으란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분과 헤어지고 보니 박군이 한쪽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미안했다. 인정머리 없는 내가 미웠다. 그렇다고 타향살이하고 계신 분에게 말할 처지가 못됐다. 혼자만 먹고 왔다고 미안하다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분(아저씨)은 좌익세력에 가담하고 쫓기는 몸이다. 그래서 낯선 이곳 여수땅에 피신하고 계신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밥도 얻어먹고 노자로 2000원을 받았으니 든든했다. 박군에게 집으로 가자고 했다. 박군은 싫다고 했다. 사실 그는 조실부모(어려서 부모를 여읨)하고 연로하신 외조부모님과 살고 있었으니 희망이란 없고 그렇다고 새경(私耕, 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연봉) 받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구태여 외가로 가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가야 하겠다. 멋모르고 집을 나왔지만 돈도 없이 타간에 있어봤자 구걸하는 걸인밖에 더 되겠느냐 싶어 그와 헤어지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떠나고 보니 그 밥을 해주셨던 토관 속에 사는 그 부부에게 미안했고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 정말 죄송스러웠다.


 송정리에서 기차를 목포행으로 갈아타고 영산포역에서 내렸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데 불안했다. 버스정류장에 가서 가는 버스가 있나 물어봤다. 막차가 떠나고 없단다. 5리(2km)쯤 나가면 가는 차가 있을 테이니 빨리 가보란다.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는데 외딴 주막집이 있어 차편을 물어보았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막집 여주인이 있었고 차가 끊기고 없단다. 자고갈곳이 없나 물어보았다. 여기는 촌이라 여인숙집은 없단다. 읍까지 한참 가야 된단다. 아이코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시장도 해서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켰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근심하는 꼴을 여주인이 보더니 밥을 사 먹는다면 자기 집에서 재워줄 수 있단다. 그래서 저녁과 아침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방으로 들어가란다. 삼간초가인데 가운데가 부엌이 있고 주막집과 나중에 알았지만 저쪽 방은 엿을 만드는 방이었다. 금방 어두워졌다. 등잔불을 켜니 방안이 밝았다. 방안을 훑어보니 궤짝하나에 꾀죄죄한 조선이불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 어찌 되었거나 잘 수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젊은 여자인데 혼자서 술을 팔면서 살고 있단다. 밥상을 들여다 놓고 하는 말이 밤에는 동리사람들이 술 마시러 온단다. 누구냐고 물으면 내 동생이라고 할 테이니 신북면에서 사는 동생이라고 하란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혼자 살고 있으니 혹시라도 의심받을까 봐 그런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조금 있으니 젊은 남자들이 몇이 모여들었다. 술상을 차려놓고 술을 마시며 내가 누군가를 물어보고 있었다. 동생이라고 하니 큰 남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밤이 깊어갔다. 술을 마시던 남자들도 다 가고 우리 둘 만이 남았다. 이불을 깔아주는데 옷을 벗을 수도 없어 입은 채로 눕고 이불을 덮었다.


 이불이 하나밖에 없어 같이 덮어야 했다. 나는 창문 쪽에 누웠고 주인여자는 안쪽에 누워자는데 왠 놈의 벼룩이 물어대는데 환장하겠다. 어쩌다가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가 깨어보니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이 새어 일찍 일어나 가겠다고 했더니 아침밥을 지어줄 테이니 먹고 가란다. 쑥스러워 빨리 갈려고 하는데 찬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밥상을 차려다 주니 안 먹고 갈 순 없고 해서 물에다 말아 조금 먹고 서둘러 떠났다. 그 여주인은 밖에까지 나와 잘 가라고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급히 떠나갔다. 영산포에서 우리 집까지는 90리(35km) 길이다. 신북과 영암읍을 지나 월출산 밑 풀씻재(치)를 넘으니 해가 중천에 떠있어 점심때가 지난 것 같았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니 저녁때쯤 되었다. 부모님은 어데를 갔다 오느냐고 물으셨지만 말도 못 하고 동생들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후에 알았지만 박군은 그 길로 여수에서 가까운 시골로 들어가 머슴살이하다가 6.25 사변 후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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