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7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부친과 나는 동네 사랑방에서 자곤 했다. 그런데 옴(개선)이 옮았다. 동네가 옴병에 시달렸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이 옮으니 가족전체가 전염됐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에 가려움증이 만연되며 지독한 고생을 했다. 밤이면 화롯불에 유황을 피워놓고 환부를 쬔다. 그때만 조금 나은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또 가렵다. 1946년의 해에는 우리 가정에게는 액운이 있는 시련의 해였나 보다. 그해 세상을 뜨신 조모님의 연세가 69, 모친은 39, 누님은 19, 아홉수가 셋이라 그랬나 하는 미신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 고통스러웠던 해도 지났고 새해를 맞았다. 1947년은 우리에게 밝은 해가 되겠지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는 행운의 여신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님은 일본에 살 때 18세 때 부친의 강요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결혼생활은 지속하지 못하고 파경으로 끝을 맺었다. 귀국해서 20세 때 이웃사람의 중매로 목포에 사는 남자와 재혼을 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17세부터 19세 사이에 처녀들은 결혼을 했다. 19세가 넘으면 노처녀 취급받을 때였다. 누나는 그렇게 해서 우리 식구에서 떠났다. 8 식구로 줄었지만 입에 풀칠하기에는 별차가 없었다. 식구 하나라도 덜기 위해 나는 평리의 김연창 씨 집에 고용살이 갔다. 주인은 일본에서 살다나 왔고 부모가 준 재산으로 중농쯤 될 것이다. 주인의 연세는 30대 초반이고 부인은 20대 중반으로 생각된다. 물방앗간을 경영했는데 나는 대부분 방앗간에서 정미작업을 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했다. 내 나이 17살 때 일꾼으로는 어리다고 일 년 세경(급료)가 벼 한섬(石)이란다. 쌀로 따지면 1가마다. 상일꾼이 6 섬이라 그 정도가 가당했겠지. 물방아라 물의 힘을 동력으로 해서 정미기를 돌리는 것이다. 힘은 약하다. 4마력 정도의 힘이라 가히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러던 중 마씨문중의 종산을 관리하면서 거기에 딸린 전답을 지어먹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전 관리인이 남자는 없고 여자들만 있는 집이라 관리가 소홀하다는 이유로 부친께 맡게 하신 것이다. 집은 두 채인데 전 관리인 가족이 이사 갈 곳이 없어 아래채로 내려앉고 우리가 본채로 들어갔다. 본채라고 해야 방, 마루, 부엌의 삼간초가일 뿐이다. 그래도 헛간이 있어 돼지와 닭도 칠 수가 있었다. 조건부 입주였다. 산을 관리해줘야 하고 주인네 재사 때마다 올릴 제물을 장만해 주고 조그마한 텃밭을 사용하고 소작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몫은 별로 없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텃밭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니 우리에게는 큰 것이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도 자기 농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첫째, 어린 동생들이 자유스러워 좋았다. 고조모님 댁에 살 때에는 부자유스럽다. 집주위가 밭이었는데 농작물이 없어지면 우리에게 혐의를 두니 곤혹스러웠다. 그리고 정말 어려웠던 것은 고조모님의 아들이신 삼촌께서 늦장가를 간 것이다. 삼촌부부가 신혼첫날 안방에서 자게 됐는데 우리 가족이 작은방을 쓰니 고조모님은 잘 곳이 없다고 신혼방에서 신부신랑과 같이 자는데 정말 미안했다. 고조모님이 한동네에 딸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주무셔도 되는데 고집스럽게도 신혼부부가 자는 안방에서 주무셨다.
이사한 곳은 외딴집이었지만 뒤에는 산이고 넓은 마당에 우물도 옹달샘물로 가까운 곳에 있고 모든 것이 고조모님 집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나이 19살에 한글을 터득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공부했고 한글은 배우지 못했다.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또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일본에 동화되어 성씨도 타케다(武田)로 개명했고 일본인과 같은 행실을 했고 조선이라는 땅도 일본의 일부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대만도 일본의 영토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애국이니 하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냥 일본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주위에서 깨우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부모님도 생활에 쫓기다 보니 그러한 여유도 없으신 것 같다. 막상 귀국하고 보니 언어소통이 불편했고 글을 모르니 장님이나 진배없다. 글자로 의사를 표현할 때는 우리말을 일본어로 표기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러나 배우고자 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던 차에 동생 영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배워오면 나도 같이 가갸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글은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