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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5. 2023

부모님의 고향 전라남도 강진

할아버지 회고록 6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의 고향 전라남도 강진  



 우리는 외가친척되는 가족과 일본에서 함께 넘어와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까지 동행했다. 두 집 식구가 짐을 싣고 타고 해서 고향에 도착했다. 동행한 외가 친척 가족은 친척들이 나와서 반가히 맞으면서 짐을 날라 가져가는데 우리는 가자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다. 조금 있으니 환갑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우리에게 다가오시더니 부친을 붙잡고 반가워하신다. 머리는 하얗고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는데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친의 고모님이시란다.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건너편 비탈진 밭가운데 오두막 초가삼간이 조고모님 집이란다. 갈 곳이 없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짐이랄 것도 없는 보따리를 둘러메고 따라갔다. 지붕이 낮고 토담으로 지은 야트막한 집이다. 2 평남짓 마당과 부엌은 왼편에 있고 가운데에 큰방이 있고 오른편은 작은방이 있다. 작은방이 비어있으니 우리에게 쓰란다. 방안을 들러보니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질 않는다. 한참있다 자세히 보니 흙으로 된 벽에 신문지로 더덕더덕 발라서 떨어져 흙이 보일 정도로 남루했다. 봉창문도 없어 컴컴한 데다 빈방으로 놓아두었기에 습기가 차 곰팡이 냄새로 코를 찌른다. 방은 사방 7척(2.1m)이나 될까. 반평도 못될 정도의 방에 짐을 들여놓고 열식구가 들어앉았으니 가히 짐작할만할 것이다. 더욱이 조모님은 병약하신 데다 며칠간을 열차 선박 그리고 화물차칸에서 시달려 중병이 나신 것이다. 누워계시니 식구가 다 들어앉을 수가 없다. 화물차칸은 그래도 약간의 공간이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곳 좁은 방은 요지부동이다. 고조모님의 배려로 나와 남자동생은 안방에서 잘 수 있게 해 주셨다.


 전년농사는 풍년이 들었다고 하지만 지금과 같지 않고 한 마지기(200평)에 쌀 2 가마(叺) 수확이면 상답(농사가 잘되는 논)이라고 하던 때라 식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농촌에는 그 당시 춘궁기 보리고개라는 것이 있다. 부농가에서는 그 무서운 춘궁기를 모르고 살았지만 빈 농가나 소작농가는 궁핍함이 이를 데 없다. 꾸어다 먹은 양식 갚다 보면 겨울부터 죽(粥)을 먹으며 양식을 절약한다. 그렇게 해도 봄이면 양식이 바닥난다. 그 당시 가난한 농민에게 괴롭게 하는 악습이 있었다. 추수 때 50%의 이자로 갚기로 하고서 부족한 식량을 빌려다 먹는다. 없는 사람은 가을에 수확한 식량을 도리에미타불 있는 자에게 빼앗기고 산다.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다가 보리가 푸릇푸릇 이삭이 나면 익기 전에 보리모가지를 잘라다가 가마솥에 쪄서 말려 풋보리로 연명해 가다가 추수 때가 되기 전에 익지 않은 벼를 베어다가 해 먹기를 하니 농촌에는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빈곤층에 속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그때가 농번기라 품팔이가 많았다. 일만 하면 품삯을 양식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까 부친과 모친은 매일 품팔이 나가신다. 그런데 품삯이 너무나 적다. 하루품삯은 남자 대두 한 되(1600g) 여자는 반되(800g),  장정이 일 년 머슴살이해봤자 겨우 쌀 6 가마 정도였으니까(98년 기준으로 80kg 가마당 15만 원씩 계산해 보아도 90만 원_1998년 할아버지가 회고록을 작성할 당시 기준이며 2023년 기준으로 동일하게 계산하면 80kg 가마당 20만 원씩 120만 원)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착취했던 시대였던가 보다. 그러니 부모님 두 분이 매일 품을 팔아도 우리 가족(식구)을 감당할 수가 없다. 아침밥은 잡곡밥으로 점심은 집에 있는 식구는 그럭저럭 때우고 저녁은 죽(粥)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금은 죽이라면 별식(미)라고 하지만 그때는 살기 위해 먹은 음식이다. 죽에는 오만 잡동사니가 들어간다. 호박잎, 감자줄거리 등 먹을 수 있는 푸성기는 다 들어간다. 달밤에 마당에서 평상을 펴놓고 밥상 아닌 죽상(粥床)을 받아보니 죽이 묽어 달(月)이 그릇 안에 가득히 들어와 비친다. 시인이라면 시한수 지어 읊었을 것이다. 그것도 먹어야 살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면서 먹는 식구들!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우리는 전자에 해당되겠지.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부자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가난했다. 자식들도 능력도 없으면서 대여섯은 보통이다. 조모님은 병세가 더 악화되어 바깥출입은 일체 못하시고 누워만 계셨다. 메밀을 맷돌에 갈아 묽겋게 죽을 쒀서 드셨지만 두 달도 채 못되게 사시다가 그해 음력 5월 10일 세상을 뜨셨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하는데 무어가 있어야 치를 것 아닌가. 그때 평리에 만주에서 살다 귀국한 고모 한분이 계셨고 일본인이 두고 간 땅을 분배받아 가옥과 농지를 소유하고 농사를 지었지만 고모부가 워낙 구두쇠라 우리에게 쥐꼬리만 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다행히 선산이 있어 장지는 남편이신 조부님의 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관을 구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 그 시대에는 노인이 있는 집에는 생전에 관을 미리 만들어서 옻칠을 해놓고 했는데 우리 같은 빈민에게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쨌거나 장사는 치러야 하고 그렇다고 고모님의 도움을 바라지도 않으신 것 같다. 큰 외조부님께서 손수 대나무로 죽관을(대나무를 쪼개서 다듬어 발을 엮어 시신을 쌈) 만드셔서 관을 대신하게 해 주셨다. 장례는 삼일장으로 했다. 동네사람들이 바가지에다 쌀을 갖다주는이도 있었다. 상여는 앞뒤에서 두 사람이 메고 부친과 나는 뒤를 따랐다. 나는 한국의 장사법이 이한 것인가 했다. 일본에서 장사 치르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장지에 가니 벌써 매장자리는 만들어 놓았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하관식으로 흙을 덮고 상주는 하산하고 일하는 분들이 남아서 묘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삼우제날은 가족이 함께 가서 장사를 지내고 내려왔다. 그리고 풍습대로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삿밥을 차려놓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하신다. 나는 장례가 다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동네에서 초상이 났는데 조모님 장사 지낸 방식과 판이하게 다르다. 넓은 마당에 차일을 쳐놓고 상주는 문상객이 문상 올 때마다 곡을 하고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밤이면 불을 밝혀 마치 잔치집과 같다. 보통 5일장으로 하고 상여가 나가는데 굉장하다. 장정 여남은 명이 상여 좌우에서 메고 소리꾼이 앞에서 소리하면 상여꾼이 따라서 소리를 한다. 상여는 꽃으로 장식하고 뒤에는 상주와 친척이 따르고 그 뒤에는 만장을 동리아이들이 들고 따라간다. 귀인이나 부잣집의 장사에는 만장이 수십 개라 길게 늘어져 마치 큰 행사의 행렬 같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전통 장례풍습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전하의 장례행렬은 수 km에 달했다고 한다. 빈부와 귀천의 차별(차이)은 이 행렬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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