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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4. 2023

패전 후 일본

할아버지 회고록 4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패전 후 일본



 결국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고 일으킨 대동아전쟁(이차세계대전)도 연합군에 의해 패했다. 그들은 패전이라 부르지 않고 종전이라 불렀다. 패전국의 국민은 비참했다. 가는 곳마다 이재민의 헐벗음과 굶주림, 폭격이 심했던 대도시에는 양지바른 곳에는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虱)를 잡거나 누워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살던 세토시는 공업(군수) 지대가 아니었기에 일부폭격은 당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그해 여름 비가 자주 내렸고, 때아닌 벚(櫻)꽃이 많이 피었다. 일본인들은 경사가 있을 것이라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한 소식이었던가 보다. 그해 농사는 흉년이었다. 태풍으로 벼이삭이 쓰러져 물에 잠겨 싹이 나와 못 먹게 된 것이 많았다. 식민지에서 조달했던 식량도 패전 후 조달이 불가능해 식량난에 허덕였다. 이때는 모든 음식을 배급제를 실시했고 음식 암거래가 성행했다. 우리 한국인은 조선보도연맹이라 하는 단체에서 매월 국수와 건빵 등을 나누어 주었고 암거래로 식량을 구하는데도 경찰의 제재를 크게 받지 않았다. 전승국은 일등국이고 우리나라와 같은 해방된 나라는 이등국, 패전국은 삼등국이라 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굶어 죽었다는 소문은 없었다. 부친은 아오모리(靑森)(일본의 북단가 오징어가 많이 나는 곳이다)에 가셔서 오징어를 사다가 팔기도 하고 나는 누나와 함께 나가노(長野) 지방에 가서 사과를 사다가 팔았다. 가끔 경찰의 추적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오징어 몇 마리 주면 좋아라 하고서 가버린다. 돈을 모으지 못했지만 양식은 그런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방에 가서 물건을 사고팔고 했는데 항상 밤기차를 이용했다. 당시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고야역에 가서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전날 예매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요금을 내고 표를 사가지고 기차를 탄다. 역사 안은 온통 연기로 가득 차 있어 마치 부랑자들의 집합소와 같다. 천정과 벽은 새까맣게 그을려 보기 흉할 정도다. 패전국의 참상이 이런 것인가. 침략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죄인가. 한 번은 나가노 직행기차표가 매진되어 동경역 경유표를 샀다. 밤열차를 타고 동경역에 도착했는데 열차승강장(Platform) 지붕을 폭격에 날아가버렸고 양철지붕으로 비막이로 해놓았다. 세계의 대도시의 역이라고 자랑했던 동경역이 참 비참해 보였다. 동경역 대합실에 들어가서 나가노로 가기 위해 환승역 신주쿠(新宿) 역으로 가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하도를 이용해야 한다. 지하도로 가는데 부랑인들이 여기저기 쪼그려 앉아 담요쪼가리를 덮고 자는지 죽었는지 꼼짝하지 않고 있다. 냄새는 지독하다. 대소변을 아무 데서나 마구 처리하는가 보다.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미 군인이 양담배를 팔고 있다. 바로 부랑자 쪼그리고 있는 옆에서 대조적이었다. 이것도 승자와 패자의 구별된 모습일까. 이들에 대한 일본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패전일본은 비참했다.


 우리는 항상 밤기차를 이용했다. 목적지에 아침에 도착해야 종일 물건을 시골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모아서 밤열차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밤열차는 만원이다. 서울의 지하철 아침출근때와 같을 것이다. 장거리여행이지만 열차에 올라타면 내릴 때까지 꼼짝달싹 못하니 오줌이 마려우면 옷에다 쌀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물은 가급적 마시지 않고 승차직전에 용변을 보고 탄다. 시골이라 밥을 사 먹을 곳이 없어 두 끼 정도 먹을 밥을 주먹밥으로 해서 피마자잎으로 싸가지고 보자기에 싼다.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는 물건을 갖다주고 곡식을 주로 산다. 때로는 능금도 많이 사간다. 가져가기만 하면 돈이 남는다.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다닌다. 집으로 올 때에도 밤열차로 온다. 새벽에 나고야역에 내려서 전차로 집 가까운 역에서 내린다. 역전에는 파출소가 있기 때문에 피하기 위해 개찰구로 나가지 않고 철길로 걸어 나온다. 어쩌다가 그들이 눈치채면 피하지만 순사(경찰)는 천천히 뒤따라온다.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아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찾아와서 추궁한다.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오징어나 무엇 조금주면 고맙다고 가버린다. 일본은 식량난이 극심했다. 아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한 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경찰간부 부인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 털실(毛糸) 주먹만큼 한 것을 가지고 와서 쌀 한 홉만 달란다. 구걸하는 그를 보니 패전국의 국민은 이렇게 비굴한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십 년 후에 다시 재기할 것을 다짐했다. 강인한 일본인의 근성이다. 기필코 일어날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참혹한 속에서 재기했다. 근검절약하고 파괴된 공장을 다시 세우고 본질기술과 실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우리의 6.25 전쟁을 이용했다. 미국은 전쟁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본을 이용했다. 축적된 기술로 군수품의 생산, 정비, 조달을 맡아서 했다. 파괴된 시설은 복구되고 실업자를 구제하고 일석이조의 기회를 얻었다. 일본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분발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는가. 6.25라는 전란을 겪었다.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수도서울은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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