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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3. 2023

패전 전 일본

할아버지 회고록 2

패전 전 일본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패전 전 일본



 우리는 세토시의 변두리에서 살았다.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앞에는 옛 공장지대였었는데 다 헐어버리고 넓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라기보다 폐허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주민들이 그 공터에다 채소 등을 심어 가꾸어 먹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박, 가지, 고추 외에 여러 가지 채소류를 심어 먹었다. 뒷산은 끊어서된 지방도로가 있다. 그 끊어진 협곡 양편에 땅굴을 파서 한편은 육군이, 다른 한편은 해군이 군수물자를 은닉보관하고 있었다. 그 땅굴을 팔 때 많은 징집된 조선인 군인들이 작업을 했다. 그 조선인 군인들도 일요일에는 휴무했던 것 같다. 외출을 했지만 초년병들이라 이역만리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우리 조선인들이 사는 집을 찾아오곤 했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따스운 밥을 해서 먹이는 등 대접을 해주었다.


 가을에는 십오야의 축제가 있는데 추수가 끝나고 각 가정마다 햇곡으로 단자를 만들고 햇과일을 마루에다 차려놓고 달맞이를 한다. 화병에는 갈대꽃을 꽂아놓고서 밤이 깊어지면 아이들은 그것들을 훔치러 간다. 긴 대나무에 꼬챙이를 달아 울타리 밖에서 찍어낸다. 때로는 울타리를 넘어가서 훔쳐오기도 한다. 집주인은 아예 방문을 닫고 모른 척 훔쳐가게 놓아둔다. 그것이 일본의 풍습이다. 그날밤은 아이들의 잔치가 된다. 실컷 먹고 뛰어다닌다. 그리고 고을마다 오마쯔리(オマツリ)가 있다. 고을신의 축제날이다. 제단에 떡과 과일 등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북을 치고 요란하다. 며칠간을 계속하는데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큰 잔치가 된다. 보자기를 가지고 이 고을(농촌마을) 저 고을 돌아다니며 떡을 얻어온다. 하루종일 다니면 보자기에 가득 찬다. 그날만은 인심이 좋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이차대전으로 그 풍습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옛적 그 풍습을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들었다.


 소학교 3학년(1940년) 때의 일로 하루는 서커스(Circus)가 들어왔다. 호기심에 가보고 싶었다. 친구와 함께 둘이서 공연장이 있는 후카가와(深川)신사 광장에 걸어서 갔다. 서커스 천막이 있는 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차례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일본인들은 질서정신이 있었다. 우리도 그 줄끝에 섰다. 줄은 약 200m 정도 될 것이다. 양편에는 노점상들이 들어서서 마치 우리나라의 포장마차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서있는 줄은 앞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둘이서 앞으로 가봤다. 좁은 출입구 앞의 공간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으로 발하나 들여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몸집이 적어 비집고 출입구로 들어가 매표소 앞으로 갔다. 입장표가 소인이 50전이었던 것 같다.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50전 지폐를 꺼내서 막 표를 사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데선가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나자마자 천막 안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밖으로 내풍기기 시작했다. 천막에는 방수효과로 양초칠을 했기 때문에 불만 붙었다 하면 불을 끌 수가 없다. 순식간의 일이라 나는 당황해서 뒤돌아 나왔다. 워낙 좁은 공간이라 뒤에서는 밀고 나오고 앞에는 돌담에 부딪히고 개천이 앞을 가로막고 나갈 수가 없다. 밀려 나오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정신을 잃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려 일어나 급히 좁은 길 쪽으로 뛰어나왔다. 뒤돌아 봤더니 불길은 출입구까지 번져와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내 운동화 한 짝이 없어진것을 알았다. 급히 찾아보았다. 신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서 내 운동화 한 짝을 찾을 수 있었다. 무서운 불길 속으로 뛰어가 운동화를 겨우 들고 나왔다. 학교에서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배급받지 못하는 운동화였기에 그 운동화는 나에게는 귀중한 것이었다. 천막은 불에타 내려앉아 버렸고 아비규환 아수라장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참상 그대로였다. 처녀곡예사들이 한 조각 얇은 옷에 불에타 연기가 나온 것도 모르는지 말(馬)을 끌고 나오기도 하고 맹수의 우리를 밀고 나오는 장정들 옷에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살은 화상으로 붉게 된 사람, 옷이 다 타버려 알몸으로 간신히 기어 나오는 사람들, 쇠줄에 메어져 있는 원숭이는 그대로 타 죽어 있었다. 부모님은 서커스 구경 간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일하다 말고 나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찾으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집으로 달려왔다. 부모님은 늦게까지 찾아 헤매었다가 집에 오셨다. 나를 직접 보시고 안심하셨다. 그 화재로 불에 타 죽은 사람도 많았고 부상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다. 주로 어린 학생들의 희생자가 많았다.


 나는 소학교 때 신문배달도 했다. 그 당시 세토시에 신문보급소가 하나로 통합된 보급소가 있었다.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 산케이(産經), 중앙, 영자신문이 한 보급소에서 취급했다. 구역별로 정해져 배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잘못하여 다른 신문을 배달할 때도 있었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같이 배달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보급소까지 4.5km되는곳까지 뛰어간다. 배달할 신문과 수량을 본인이 직접 챙겨서 나온다. 그때부터 뛴다. 배달이 끝날 때쯤이면 아침 7시가 조금 넘는다. 다행히 우리 집 앞에 경찰서가 있었는데 그곳이 끝나는곳이라 학교가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아 좋았다. 비가 오는날이면 무척 고생스럽다. 지금처럼 비닐지가 있지 않고 방수포로 신문을 싸가지고 뛰어야 하기 때문에 우산이나 우의를 입을 수 없고 비를 맞으면서 뛰어야 했다. 집집마다 대문에 지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대문 안 마당에 던진다. 비에 젖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욕먹는다. 한번은 배달이 끝났는데 신문이 많이 남았다. 보급소에서 틀림없이 수량을 맞게 가지고 나왔는데 겁이 나기도 하고 걱정이 됐다. 집에 가서 누나(姉)를 불렀다. 신문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나와 같이 처음부터 다시 돌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돌면서 확인했다. 중간골목길을 돌지않고 지나쳐버린것이 확인되어 늦게나마 배달을 할수가 있었다. 월말이 되면 신문대를 수금해야한다. 수금실적이 좋은사람에게는 포상이 있었다. 부지런히 수금했다. 포상도 타기도 했다. 또 구독자 모으는데도 포상을 주기때문에 판촉도 열심했다. 급료는 귀국할때까지 저금통장에 예금했는데 아버지께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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