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5
일본의 항복, 귀국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마지막 남은 일본이 단독 세계(연합군)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와 태평양의 섬들을 상실한 일본은 본토만이 남았다. 전의를 상실한 일본은 최후의 발악으로 대항했지만 45년 8월 6일 사상 최초로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로서 전쟁은 끝났다. 그해 8월 15일 나는 방학 때라 공장과 학교에 가지 않고 놀기에 바빴다. 수영장과 농촌 등지로. 그날은 농촌으로 부친의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갔었다. 정오쯤 한 농가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일본의 국가인 "君が代"(기미가요)가 그 집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이상히 여기면서 발을 잠깐 멈추어 방송을 들었다. "君が代"가 끝나고 침통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끝나고 또 "君が代"(기미가요)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본천황의 항복메시지(Message)였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알았다. 일본은 연합군(UN)에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나는 공포에 떨었다. 아니 나뿐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미군이 상륙하면 일본인은 모두 죽인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내 나이 14살의 여름.
그러한 가운데 해방을 맞았다(1945년 8월 15일). 모두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고 속속 귀국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국(고향)에 일가친척이란 없었고 단지 고모님 한분뿐인데 그 집도 생활이 곤고해서 만주로 이민을 했는데 귀국을 했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전답이나 특별한 재산도 없으니 우리 가족은 귀국할 염두도 내지 못했었다. 농사지을 땅은커녕 기거할 집도 없는데 이 대가족이 어디로 갈 것인가 맞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해방에 들뜬 1945년도 지났고 다음 해 3월 내 나이 17살 때 부친은 갑자기 귀국을 서두셨다. 귀국을 결심하시게 된 동기는 연로하신 할머니 때문이었다. 부친은 효자이셨다. 세토시에서 효자상까지 받으신 분이시다. 조모님은 죽어서 고국의 선산에 묻히시기를 원하셨다. 일본에서 죽은 한국인들은 화장을 해서 뼈만 유골상자에 담아 고향 선산에 묻는 것이 보편화되어 왔었다. 조모님은 이웃집에서 그러한 것을 보신 것이다. 그게 싫으셔서 죽어도 조선땅에서 죽어야 하겠다고 부친에게 말씀하신 것 같다. 조모님은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예상하신 것 같다. 효심이 강하신 부친은 닥쳐올 고생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귀국을 결심하신 것이다.
일본정부는 한국인이 빨리 한 사람이라도 더 귀국하기를 바랐다. 그해 일본은 흉년이 들었고 식민지에서 들여왔던 식량도 유입이 두절되었으니 식량난이 심해 한국인의 출국을 바랐을 것이다. 귀국신청 즉시 귀국증명서가 나왔다. 모아놓은 재산도 없다. 가재도구도 팔만 한 것도 없다. 설혹 있다 해도 살 사람이 없다. 농짝하나 제대로 없는 세간살림에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밥은 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솥과 그릇이 귀국 보따리의 전부다. 짐은 탁송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휴대해 가야 한다. 짐이라고 해보았자 별것이 없었다. 이불과 의복 그리고 취사도구 그리고 식기류가 고작이었다. 환전은 일인당 일화 2,500원. 우리 가족이 10명이라 2만 5천 원을 바꿀 수 있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다. 이웃집 아는 고향사람이 우리 다음에 귀국한다고 우리에게 환전을 부탁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집결지인 나고야역에 갔다. 오후에 규슈(九州)로 가는 조선인 귀환자 열차에 승차했다. 호송은 영국군이 담당했다. 오후 4시경 미군수송선(L.S.T)으로 출발 다음날 아침에 부산항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하선해서 창고 같은 건물에 임시 수용했다. 미군 방역반에서 나와 방역을 한답시고 분말 D.D.T를 옷 속에 마구 뿌리는데 온통 하얗다 못해 마치 밀가루를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우리의 몰골이 꼴이 아니다. 떠난 지 3일이 되도록 세수도 제대로 못했다. 그 당시 기차의 객실은 낡아 굴속에 들어갈 때마다 연기와 탄분진이 창틈으로 날아 들어와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디젤이나 전동차가 아니고 석탄을 때는 기관차였다. 문을 닫고 갈 수도 없고 열고 가면 연기와 분진이 날아 들어오니 정말 견디기가 어렵다.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질서도 없고 시간개념도 없이 가면서 오는 열차 뒤에 오는 열차 다 통과시키고 가니 기관사 멋대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열차가 한참 가다가 역도 아닌 곳에 섰다. 선로가 단선이라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를 비켜주기 위해 멈추는지 알았다. 그런데 기관사와 차장이 내려서 건너편 집으로 들어간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하러 간 것이다. 한참있으니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열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열차가 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이다. 이것이 해방된 우리나라의 무질서한 국철의 모습이다. 그러니 사회질서야 말할 것도 없겠지. 해방된 조국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한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