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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 회고록 Dec 11. 2023

1930년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간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회고록 1

1. 1930년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간 아버지, 어머니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1930년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간 아버지, 어머니



 나의 출생지는 일본 아이치(愛知)현 세토(瀨戶)시. 나고야(名古屋)시에서 전차를 타고 한 시간쯤 가는 거리인 곳이다. 세토시는 소도시로서 도자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인구는 약 4만(8.15 해방당시). 나의 출생 년월일은 1931년(음) 4월 19일 우리 집은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부친의 본고향은 전남 강진군 작천면 삼열리였으나 생활이 곤고해서 내가 태어나기 전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때 한국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는 한 장사 아니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국에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은 구태여 타국이나 다름없는 일본에 가 살겠는가.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황국신민이라고 외치며 동등하게 대한다 했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민족이고 우리나라는 일본에 합방된 속국(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집은 수입이 적은 반면에 식구는 많아 여간 어려운 생활이 아니었다. 웬 자식들은 그리 많이 낳았는지(물론 그 당시는 다 그러했지만)(그 당시 세계의 인구가 20억, 일본은 한국을 합해서 1억(일본 7천만, 한국 3천만)이라 했다) 해방당시 우리 가족의 연령별로 살펴보면 이렇다. 조모 71세, 부친 50세, 모친 38세, 누나 18세, 나 15세, 여동생 길임 12세, 영례 10세, 남동생 영호 7세, 영채 5세, 또 여동생 영자 2세 해서 열 식구, 그때도 대식구라 했다.


 부친은 식구가 많아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이것저것 안 해본 것이 없으신 것 같다. 마차나 손수레도 끌어보셨고 건어물장사 풀빵장사 채소장사 막노동 등 가리지 않고 돈만 많이 벌 수만 있다면 가리지 않고 하셨다.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라 하여 차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직장에는 차별했다. 관직이라든가 기업체는 요직은 주지 않는다. 어데까지나 밑에 사람으로 고용했다.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신분이 확실하고 일본인이 추천한 사람은 예외일 수도 있었지만 못 배우고 한국에서 건너온 아버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국인으로 육군중장까지 올란 간 최모중장도 전투지휘관으로는 임명하지 않고 남방부 포로수용소장과 같은 비전투지휘관으로 보임했다 패전 후 포로학대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배급과 같은 대우에는 차별하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 가난했지만, 가난을 탓했거나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도 없고 부자들인 일본인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었다. 부친은 나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늦장가 가시고 늦게 낳은 아들이라서였을 것이다. 부친은 2대 독자이시고 나를 36세에 낳은 자식이라 그러하셨을 것이다. 가끔 하루일을 마치시고 집에 오셔서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다찌노미"(たちのみ) 집(서서 마시는 술집)으로 가신다. 주점에 가면 줄을 서 술과 안주 일인 분의 표를 산다. 그 표를 주점 안에 들어가서 내밀면 일인 분의 술과 안주를 접시에 담아 내준다. 부친은 술을 좋아하셨기에 일인 분으로는 부족하셨던 것 같다.  술 1인 분이라고 해야 겨우 소주와 청주 한 홉(180ml로 약 소주 3잔 반)이라 좋아하는 사람은 부족하겠지. 표 한 장을 사고서 줄 뒤에 다시 서서 또 한 장을 산다. 2인분의 술과 안주를 탁자 위에 놓고 술을 드신다. 안주를 나에게 먹으라고 하신다. 안주를 나에게 먹이기 위해서 나도 꼭 데려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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