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7
17일 상담하기 전날, 병원에서 심층 심리검사를 받았다. 풀배터리에서 웩슬러 지능검사를 뺀 검사라고 보면 된다. 21살에 풀배터리를 받은 이후로 7년 만에 받는 심리검사였다. 그리고 그 두시간이 너무나 힘들었다. 심리상담 선생님이나 주치의 선생님처럼 나의 편에서 서있다는 무언의 메세지가 담기지 않은, 평가를 위해 나의 삶의 히스토리를 궁금해하는 건조한 질문들이 내 아픔을 긁어놓았다. 나를 심리적으로 평가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발굴해 내기 위한 직업으로 충실했던 이 과정이, 나의 마음에 에너지에는 무언가 눌린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어려움을 주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해받는 것에 대한 갈망이 높다. 나는 직접적으로 내 욕구와 답변받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데 미성숙하기 때문에 때때로 상담선생님과 소통할 때에 나는 질문으로 내 욕구를 표현하지만 나의 액면가의 질문만을 보고 상대방이 답변을 했을 때 불통의 답답함과 서운함으로 마음이 확 번지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
내가 “선생님이 상담 일을 그만 두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만약 선생님께서 오직 질문의 표면적 의미만 생각하며 네/아니오 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엄청난 답답함과 욕구불만을 안고 상담을 끝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재와 인연의 끝이 있는 유한성,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주셨는지
“저는 상담일도 잘 맞고 공부도 재밌어하고 오래 상담 할 것 같아요.
저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지 않아요.
어때요? 검사(내 마음 속 엄격한 강박적 자아를 부르는 호칭)가 말하는 10년 후 같은 오랜 시간 후를 약속할 수는 없지만 대답이 됐을까요?“
모든 대답 중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지 않는 다는 말은 내 표면 그대로의 질문이 아닌 내 마음을 읽어주신 대답이라 내 욕구가 충족된 느낌이 들어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안다. 앞으로 살아가며 가까운 관계에서 잘 소통이 되려면 표면 그대로의 욕구와 의문을 스스로 잘 알아차리고 그대로 표현하는 법을 계속해서 익혀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도대체가 내 마음을 알 생각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 여전히 미성숙한 마음 속 어린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읽어주고 표면으로 표현하지 못한 두리뭉술한 질문을 듣고도 진짜 내 속마음을 읽어주는 사람들과의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지금 상담에서 하는 중이다.
나는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의 도움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 나를 이끄는 사이렌의 노래에 홀리듯 끌려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약이 효과를 발휘해 그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는 죽음의 부름을 그리워 하는 역설과 양가감정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 회기에서 남보다 못한 가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가슴이 찢어지고 죽음과 맞바꾸고 싶을 만큼 비참함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표출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받아들이기’를 꺼내셨다.
내가 정말 못하는 받아들이기.
나는 이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나면 나는 정말 가족이 없고, 뿌리가 없는 정서적 고아로 자랐다는 사실이 현실이 될까봐,
정서적 교류며 가족의 사랑은 전혀 경험할 수 없이
얼굴만 보면 플래시백과 해리의 고통이 덮치는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30년은 더 산 그들의 삶의 지혜가 필요할 때 연락할 수 있다는 어른으로 내 곁에 있어주기를, 그래도 손을 뻗었을 때 닿는 세월의 향기가 느껴지는 더 큰 어른이 버티고 있는 진짜 고아는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보다 못한 경험을 안겨준 가족마저도
남보다 못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잔인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아직도 못하겠다.
어릴 적 나를 정서적으로 내다 버리고 방임당한 경험을 안겨준 채 뭐가 잘못된지도 모르고 키운 그 시절의 엄마에 대한 원망이 아무리 상담을 통해 표출을 해도 줄어들지가 않는다. 이런 내가 지겹다. 이런 원망감이 부풀어올라 나를 덮칠 때면 엄마는 가해자가 되고 나는 피해자가 되는 이분법에 사로잡히며, 그런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내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자연스레 번진다. 자살은 유가족에게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남긴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고통을 우리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그 만큼 고통스럽다. 부디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가족이 얼마나 잘 못했길래 그렇게 원망스러워하는지 의아해하기 전에 나의 고통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임을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상담 내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프레임 속에서 복수를 꿈꾸는데 몰입하는 것을 상담선생님이 발견하시고 이분법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권유의 말을 건넸다. 아직 푹 빠져있는 상태였기에 귀에 잘 안들어왔지만 되짚어보니 정말 필요한 말이었다.
상담 끝자락에서 상담을 마무리 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하고 싶은게 없어요. 저번시간에 하고 싶은 것 딱 두가지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게 선생님과 상담하기와 정신과 원장님 보러 내원하기 였는데요. 딱 그것 두가지인 것 뿐이지
그렇다고 낫고 싶느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네 라고 대답할 수 없어요. 자살사고를 붙잡고 싶은 양가감정이 너무 심해서요. 그런데요. 딱 하나 정말 딱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선생님이 보고 싶어요.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의존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할래요. 저는 그거면 돼요. 지금은“
그랬더니 선생님이 대답해주셨다.
“의존하도 싶을 때는 의존해도 돼요.
그리고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또 그렇게 하면 돼요.
지금은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 드니 의존해야죠. 의존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라고.
그 말을 듣고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