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공포 극복기는 오래오래 진행 중
내가 사랑하는 네가 오늘 밤 내 옆자리에 없다.
같이 살기로 한 날 이후 딱 네 번째이다.
그 네 번 모두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 때문이어서 이해할만하고 그럴 수 있고 당연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괜찮은 척, 하룻밤만 버티려 해도 내 뇌 속 해마는 꿈틀꿈틀 일하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 매일 밤 같이 잠들던 연인이 없다는 걸 실감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 때면,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도 아무런 감정적 교류가 없던 나의 주양육자(엄마)가 떠오른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란 가슴 다독여줄까 조용히 기대하던 마음은 그대로 조용히 무시당하곤 했다. 내가 ‘놀랐다’ 화내며 호소해 보아도 그녀는 그저 몰랐다며 당연히 알 줄 알았다는 무심함과 영혼 없는 가벼운 사과로 아이는 그렇게 결핍의 호소인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마음 알아주기를 단념한 채 살아온 20여 년의 경험은 쌓이고 쌓여 4년을 심리치료를 해도 여전히 남아 분리공포를 남겼다. 물론 2021년부터 4년의 단단하고 따뜻하고 성실한 심리치료 덕에 내가 왜 이러는지의 삶의 역사, 이럴 때 어떻게 전두엽에 힘을 줘야 하는지, 언제 재경험을 하는지, 어떤 방어기제를 쓰는지 가장 잘 인지하고 노력할 수 있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방임과 학대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아 24년 그에 비례하진 않아도 적지 않은 반대 경험이 필요한가 보다 싶다.
상담치료 초기에는 상담 회기가 예상보다 조금만 미뤄져도 숨이 끊어질듯한 재경험 발작의 고통은 곧 죽어도 괜찮을 만큼 아팠다. 심장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가만히 있어도 하루종일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숨이 차고 손이 떨렸다. 그렇게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니 입맛도 없었고 안 그래도 없는 에너지에 바닥을 찍으니 저혈당도 오고 저혈압도 왔다. 그 당시에는 무슨 객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죽어도 졸업 전에는 F코드를 받고 싶지 않아 약도 없이 버텼다. 그렇게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상담선생님과의 애착이 두터워서 매 선택의 순간마다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 관계를 도망치고 싶은 마음보다 고통을 견디며 기다리고 싶은 사랑을 선택했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등장하는 학대당한 어린 나를 마주 하는 게 칼로 찢기듯이 아파서 수십 번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게 도망치지 않고 돌아올 때마다 선생님은 두려움을 참고 돌아온 나를 칭찬해 주곤 하셨다. 그 칭찬이 좋았다. 내 인생에 그걸로 칭찬받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내적 갈등으로 힘들어하다 돌아갈 때면 상담선생님이 서운해하며 나에게 죄책감을 씌우지는 않을까, 선생님이 날 못 버티겠다며 다른 상담선생님께 인계하지는 않을까, 괜찮다고 다독이는 그 말이 마음과 다르지는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애착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릴 적 주양육자와의 경험이 투사되어 재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선생님은 매회기 등장하는 모습이 한결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도되면서 무엇보다도 신기했다. ‘내 생각이 전부 틀렸다니..’ 인지의 오류를 수정하는 첫 단계였다. 그 경험을 수십 번 수백번하고 나니 점점 ‘상담선생님의 실제’와 ‘분리 시 상상 인물’ 간의 일치감이 생겨났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 사람의 본질과 나를 대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는구나’하는 안도감이 무의식 속에 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애착장애를 고치기 위한 대장정의 초반을 지나고 한창을 지나는 중에 나는 졸업하고 연애를 했다. 그리고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상담선생님보다 더 사랑하는 연애감정을 느끼는 경험이었다.(나에게 상담자에 대한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을 주는 엄마를 사랑하는 치유적 감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의 크기의 불일치감, 헤어짐의 전조, 회피형 인간의 가스라이팅, 고통스러운 헤어지는 일 등을 겪었다. 이 경험들을 통해 애착이 끊어지는 혼돈과 애도의 6개월도 지내보기도 하면서 애착의 혼란을 다스리며 버티는 기간도 지나 보았다.
그렇게 지나온 나의 1102일 동안의 인지행동 치료와 648일 동안의 약물치료는 지금 내가 잘 살아있도록, 살아서 잘 살고 싶도록 도와줘 왔고 도와주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치료 중인 사람이기에 아플 수 있다. 퇴근하고 집에 가도 애인이 없을 거라는 허전함은 금세 불안으로 탈바꿈하여 나를 괴롭힌다. 심호흡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증상에 나는 필요시 약 자낙스를 의지해본다. 이날 밤 애인이 없는 침대에서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울어도 반응해 주는 어른이 없던 시절 울지조차 못했던 나에게 눈물마저 큰 치유이자 정상적 퇴행의 일환이다. 이제는 이런 내 눈물을 보며 “아구, 내일 꼬옥 안아줄게.”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준 내 애인은 다음날 약속 그대로 나를 빈틈없이 꽈악 안아주며 토닥토닥 안심시켜 주었다. 따뜻했다. 오래오래 따뜻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으로 편안하게 스르륵 잠들 수 있는 순간이 많기를 오래오래 바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