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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을 그리지 않고, 공포를 그리다

캐서린 비글로우,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by 박재우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전쟁 영화라는 가장 남성적인 장르의 중심부에서 가장 비(非) 남성적인 시선을 견지해 왔다. 감독의 카메라는 거대한 폭발의 스펙터클이나 화려한 영웅의 서사를 좇지 않는다. 대신, 그 폭발의 직전과 직후, 혹은 그 폭발과 가장 먼 곳에서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소모되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허트로커>에서 우리는 이미 이러한 감독의 시선을 경험했다. 영화는 전쟁의 승패가 아닌, 폭발물 해체라는 '미션 완수의 쾌감'에 중독된 제임스의 불안한 영혼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삶의 의미를 고뇌하던 샌본, 딜레마에 빠진 엘드리지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섬세하게 관찰했다. 감독은 그때도 전쟁의 풍경이 아닌, 전쟁 속 '인간 군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https://brunch.co.kr/@4indie/8


그리고 돌아온 신작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서 감독의 이러한 영화적 특징은 타협을 모르는 경지에 올라 더욱 견고해졌다. 이 영화는 <허트로커>가 품고 있던 일말의 '폭발'마저 의도적으로 제거해 버린다. 영화의 무대는 시카고를 향해 날아오는 핵미사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궤적을 모니터로 지켜보는 백악관 상황실, 펜타곤, 그리고 알래스카의 군사 기지다.


<허트로커>의 제임스가 방폭복을 입고 폭탄과 '대면'했다면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인물들은 폭탄의 '실체'와 단절된 채 상황실의 모니터를 통해서만 위기를 '중개'받는다. 이것이 감독이 설계한 가장 무서운 지점이다. 영화는 단 한 번도 미사일이 날아가는 화려한 CG나 시카고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112분의 러닝타임 내내 오직 '절차'와 '딜레마'에 갇힌 인물들의 얼굴만을 프레임 속에 가둔다.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리즘' 속에서 GBI(지상 기반 요격기) 같은 군사 용어의 홍수는 관객을 소외시키지만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리얼리즘의 전제 자체를 비판할 순 있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영화의 핵심 딜레마('18분 내의 보복 혹은 항복')가 현실을 무시한 "거짓된 선택지"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현실의 '2차 타격 능력'은 시카고가 피격당하더라도 이런 조급하고 공황적인 결정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현실성이야말로 감독의 예리한 통찰일지 모른다. 이 영화는 현실 고증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자신의 논리(2차 타격)마저 잊어버릴 만큼 마비되고 공황에 빠지는 '악몽의 우화'다. 영화는 시스템이 어떻게 '거짓된 선택지'를 스스로 제조해 내는지를 보여준다.



18분의 3막: 무력함의 인간 군상

감독은 이 18분 간의 절망을 세 개의 다른 관점으로 반복하는 3막 구조를 통해 자신의 '인간 관찰'이라는 작가적 특성을 극대화한다.


1막. "완만해진 기울기 (Inclination Is Flattening)"

첫 번째 막은 백악관 상황실의 올리비아 워커 대위(레베카 퍼거슨 분)와 알래스카 기지의 대니얼 곤잘레스 소령(앤서니 라모스 분)에게 초점을 맞춘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숨 가쁘게 인물들을 따라붙으며 관객을 프로토콜이 작동하는 현장의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곳은 <허트로커>의 제임스처럼 '전문가'들이 활약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들의 전문성이 '요격 실패'라는 시스템의 결함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실패'는 50%의 확률("빌어먹을 동전 던지기")로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전문가는 무력하고, 훈련받은 이들의 침착한 포커페이스는 무너져 내린다.


2막. "총알로 총알 맞히기 (Hitting a Bullet with a Bullet)"

두 번째 막에서는 펜타곤과 국가안보회의로 이동해 브로디 장군(트레이시 레츠 분)과 제이크 베링턴 부보좌관(가브리엘 바소 분)의 시점을 따른다. 여기서 위기는 '현실'이 아니라 '전략'에 있다. '모든 핵보유국에 대한 전면적 선제타격'을 조언하는 군부와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조언하는 안보 보좌진의 대립은 정치적 선택의 공회전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들의 논쟁을 통해 시스템이 인간의 생명이 아닌, '전략적 손익'이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3막.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집 (A House Filled with Dynamite)"

마지막 18분은 대통령(이드리스 엘바 분)과 국방장관 리드 베이커(자레드 해리스 분)의 시점에서 재구성된다. 시스템의 정점에 선 이 두 인물에 이르러 영화의 시선은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파고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가장 큰 비판에 직면한다. 하필이면 국방장관 베이커의 딸이, 하필이면 그 미사일의 목표지(시카고)에 있다는 설정이다. 이것은 감독이 그토록 피해왔던 "오래된 재난 영화의 클리셰" 나 '할리우드식 신파'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이 가장 진부한 설정을 가져와 가장 비(非) 할리우드적인 방식으로 파괴해 버린다. 기존의 영화라면 이 '부성애'는 시스템을 이기는 초인적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베이커는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시스템의 수장'으로서의 역할 모두가 완벽히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딸에게 진실을 알리지도 그녀를 구해내지도 못한다. 그는 완전한 무력감의 무게에 짓눌려 건물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다.


이것은 남성적 영웅 서사와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위기를 극복하거나 고결하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굴복하여 스스로를 파괴하는 이 결말은 관객에게 어떠한 감성적 보상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국가 안보 시스템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조차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스템의 정점에 선 개인의 무력함을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는, 영화 전체의 가장 어둡고 충격적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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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진정한 공포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폭발 장면 없이도 극도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연출적 확신을 증명하는 영화다. 한 비평가의 말처럼 "굳이 폭발하는 장면이 없어도 캐서린 비글로우는 다 말한 것"이다. 다른 감독들이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순간의 불꽃에 집중할 때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집" 안에서 불이 붙은 심지를 바라보며 초침 소리를 듣고 있는 인간들의 떨리는 동공에 집중한다.


이러한 시선의 집중은 필연적이다. 2010년에 발표된 <허트로커>가 '테러와의 전쟁'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던 시대의 '개인적 중독'을 그렸다면, 최근의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혐오와 분열이 전쟁을 불사하는 '무책임한 시대'의 '시스템적 공황'을 그린다. 이를 통해 감독은 극단으로 치닫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극화하여 그들의 '프로파간다'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전쟁의 진정한 공포는 화염의 스펙터클에 있지 않다. 진정한 공포는 시스템의 공황적 마비 그 자체다. 합리적인 해법(2차 타격)을 스스로 지우고 '거짓된 선택지' 만을 제조해 내는 마비 말이다. 또한, 그 안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간의 완전한 무력감이야말로 전쟁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이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폭발이 아닌, 바로 이 '상황 자체'가 공포의 본질임을 완벽하게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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