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오래 돼 휘어진
얼마 전 할머니가 거실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잔소리를 해서 동생이 방으로 들어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방 안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어서 할머니가 뭐라고 하시는지 정확히 듣지 못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할머니가 아빠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여동생이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었던 걸 못마땅해하셨던 것이었다.
아빠는 설거지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전에도 아빠가 설거지를 종종 하긴 했지만 엄마가 오전에 일을 나가기 시작하자 아빠가 의식적으로 저녁이나 주말에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있으면 설거지를 했다. 볶음밥이나 비빔밥, 샌드위치 같은 일단 아무 재료나 넣고 한 번에 먹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건 본인이 할 수 있는 음식을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라 다들 잘 먹지 않을 때가 많아 가사일이라고 보긴 어렵다. 내가 보기엔 그건 아빠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이다. 따라서 아빠가 설거지 외에 가사일에 관여하는 건 거의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빠가 주방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싫으셨나 보다. 한 번은 아빠가 자신이 먹을 계란프라이를 할 때 할머니가 아빠를 타박했다. 남자가 무슨 그렇게 요리를 하냐고. 나도, 엄마도 있는 자리였으니 발화의도는 분명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타박하실 때도 엄마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평소에 나와 동생에게는 잔소리를 잘하지 않으시는 할머니가 입 밖으로 우리에게 불만사항을 말씀하셨다는 건 아빠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정말 보기 싫으셨던 것이다.
끔찍이 아들을 챙기는 할머니를 보면 솔직히 얄밉다. 그 순간은 아빠가 아니라 나의 아빠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아들로 보인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탁 앞에 아빠가 없으면 항상 아빠를 찾는 할머니는 엄마의 끼니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아빠 밥 묵읐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엄마 밥 묵읐나?"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처음에는 엄마의 편을 드는 건가 싶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즉, 엄마가 아빠에게 큰 소리 내는 게 길어지면 할머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역력해진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도 애정의 기울기는 여전히, 너무 명확히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언제나 '엄마'라는 든든한 편이 있는 아빠와 달리 친정엄마도 돌아가신 엄마를 보면 내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낀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일까? 할머니에게서? 아빠에게서? 결국 나는 가족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손을 거쳐 살을 발라내야 하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면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장갑을 끼고 살을 발라낸다. 모기 소리가 들리면 손이 먼저 올라가듯 할머니는 살을 발라야 하는 음식이 올라오면 생선이든, 백숙이든 할머니는 당신의 손을 올려 비닐장갑부터 꼈다. 그렇게 할머니가 발라낸 살에 할아버지의 젓가락이 향했다. 누가 가시를 발라내고 누가 살을 먹는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해진 오래된 리듬. 질문 없이 반복되는 기울어진 관계의 역할을 평생 수행해 온 할머니는 마치 그것이 본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래. 기울어진 세상에서 기울어진 애정을 목격하고 습득해 왔을 할머니는 적이 아니다. 할머니가 살아온 기울어진 세상이 엄마를 괴롭히는 진짜 적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미 그 세상을 닮아버려, 그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미움과 연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과 자꾸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미움이 충돌한다. 어쩌면 이 모순된 감정은 앞으로 내가 평생 할머니와의 관계를 살아내야 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내가 견뎌내야 할 시대와 문화의 주름이 깊게 배어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