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K손녀일기 09화

시월드 세계관 구조와 최강자

저 너머의 문을 열어

by 일상세팅러


나는 자타공인의 구내식당러였다. 식권값이 외식비용보다 훨씬 싼 것뿐만 아니라 얼른 식사하고 자유시간 확보에도 유리해서 구내식당을 애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내식당이 알아서 메뉴를 정해주는 것이 좋았다. 반대로 말하면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은 그만큼 수고로운 일이다. 내가 먹을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도 그리 귀찮고 고민되는데 타인이 먹을 음식을 고르는 건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고 피곤하다. 심지어 그 타인이 손윗사람이라면? 으악!


하지만 나는 그 고민을 매일 하는 사람을 평생 보아왔다. 시부모님의 끼니를 챙겨야 하는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한다. "저녁 뭐 먹지?"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하면 선택은 두 가지이다. 정한 메뉴를 만들어 먹거나 배달시켜 먹거나. 하지만 엄마는 선택사항이 없다. 할머니는 배달 음식을 싫어하시므로 저녁 메뉴를 정하면 요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상을 차리고. 아주 당연하고 쉽게 여겨져 잊히는 이 과정 한 단계, 한 단계에 품과 에너지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특히 시부모의 밥상이라면 더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20년 넘게 함께 산 시부모와 며느리의 관계를 밀착 관찰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된 건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도, 아무리 사이가 둥글게 깎여도, 아무리 같이 산 정이 들어도 시부모와 며느리는 '시부모'와 '며느리'라는 것이다. 본인의 식사는 반찬 한 두 개로 대충 먹을 수 있고 남편과 자식들의 식사는 메인 반찬 하나를 만들어주거나 만들어놓고 알아서 먹으라고 할 수 있지만, 시부모의 식사는 그럴 수 없다. 시부모의 상이 차려지는 식탁 위는 빈 곳을 줄이기 위해 너덧개의 기본 반찬들이 올려진다. 거기에 메인 반찬이 더해진다. 대부분 생선을 굽거나 조리고 때때로 양념고기를 볶는다. 같은 반찬이 여러 번 올라오면 "매일 반찬이 같네요." 라며 눈치 어린 말을 해야 한다.

식사 메뉴뿐만 아니다. 식사 시간도 엄마에겐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때 할아버지가 밤 9시가 넘어서 식사를 하시던 때가 있었다. 할머니는 상을 차리는 수고를 알고 계시기에 밤늦게 식사를 하려고 하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셨지만 할아버지는 드라마를 보고 드시겠다(평일 일일연속극은 9시에 끝나고 주말연속극도 9시에 끝난다)며 늦은 저녁식사를 고수하셨다. 저녁식사보단 야간식사에 가까웠다. 그렇게 느릿한 '야식'은 9시 반이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단계를 잊었으니 반성하시길. 설거지!

할머니는 먹고 바로바로 치워야 한다며 반찬그릇을 치우지 않은 상태로 식탁에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핸드폰을 보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했다. 엄마만의 박자와 속도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본인의 기준을 요구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설거지를 안 하고 자는 날에는 도마로 설거지통을 덮어놓는다. 마치 내가 회사 책상 위의 물건을 서랍에 쑤셔 넣고 퇴근하는 것처럼. 엄마에게 집은 언제나 시부모라는 상사와 함께하는 일터였다.


할머니는 엄마의 노동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신다. 일상이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 우리 며느리가 참 어른들을 잘 모신다. 할머니는 정말 칭찬으로 하는 말씀이시겠지만 나는 그 말들이 엄마를 얽매는 올가미처럼 느껴진다. 나는 엄마가 시부모를 잘 모시는 며느리가 아니라 본인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딸로서 위에서 말한 일련의 과정을 겪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물론 엄마가 조부모님의 삼시 세 끼를 챙기진 않는다. 평일에는 엄마가 아침에 일을 나가기에 할머니가 반찬을 꺼내 상을 차려드시고 주말에는 아점(가끔 아빠가 챙기기도 한다)과 저녁을 챙긴다. 요즘은 엄마가 상을 차리는 수고를 덜게 하기 위해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실 때도 종종 있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엄마의 수고를 알고 배려하려고 노력하시는 걸 안다. 하지만 가끔 시장하실 때 날카롭게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그 짜증에 서두르는 엄마를 보면 여전히 이 관계가 어디로 기울어져있는지 실감한다.


엄마의 일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식사 챙기기'여서 식사 이야기를 길게 늘여놓았지만 엄마는 다양한 부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발이 되어드린다. 아흔 내외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병원이나 은행 같은 곳에 혼자 가시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공적인 일을 스스로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곁에서 설명을 도와주거나 필요한 업무를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엄마가 하게 될 때가 많다.

가까이 사는 고모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엄마의 노고를 잘 알아주기에 두 분을 모시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고모의 일상 주변부의 날이다.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는 엄마의 매일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상의 중심에 있으니 엄마와 고모의 일상에서 두 분의 돌봄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할 수 없다.


정작 친자식들보다 더 과중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이 이상한 비중의 돌봄을 목격하며 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아내가 명절에 각자 부모님의 집에 갔다 오자고 말했다는 사연을 들었다. 정확한 흐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리효도를 바라지 말자고 아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해 라디오의 두 남성 진행자는 탄식을 내뱉었다.


"안타깝네요... 이런 세태가... 대리 효도라니."


... 화가 났다.


많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과거에서 사시는 분들과 함께 사는 나는 그동안 결혼 제도를 통해 맺어진 공동체의 문화가 '가족'이라는 단어로 숨기고 지우는 시간과 노동을 목격해 왔다. 외부인이었다가 가족 공동체에 진입한 '며느리'라는 직책의 여성에게는 정작 친자식들보다 더 과중한 짐을 짊어지는 이상한 비중의 돌봄 의무가 주어진다. 본인 부모의 식사보다 시부모의 식사를 더 챙길 수밖에 없고, 핏줄이 섞이지 않은 조상의 제사상을 준비하고, 시댁 가족 행사와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기울어진 공동체. '대리 효도'는 이미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있다. 가족 내의 특정한 사람에게 돌봄과 관계유지에 필요한 시간과 감정을 당연하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불합리함을 인지한 사람들이 왜 비난받아야 하나.


나도 이 불평등한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엄마의 역할을 나누면 엄마가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조부모님의 식사를 가끔은 내가 차리고 치우고,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거실에 같이 앉아 할머니가 가져온 농작물들을 함께 다듬고, 두 분의 보호자가 되어 동행해서 혹은 두 분의 대리인이 되어 업무를 처리한다면 엄마는 보다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역할을 거부한다. 앞에서 말한 일들이 귀찮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귀찮음 보다 더 큰 감정이 그 역할들을 거부한다. 바로 돌봄이라는 영역을 전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엄마의 위치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가 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다. 집안의 장녀라는 나의 위치는 엄마의 역할을 이어받기에 아주 자연스럽다.


감사하게도 조부모님은 나에게 돌봄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불평등을 인지해서는 아니다. 그저 자신들을 모셔야 하는 건 엄마라는 고정관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 또 다른 주요 원인은 딸인 나는 결혼하면 그때 시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엄마도 자신의 짐을 나누지 않는 나에게 서운해하지 않는다. 서운하지만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서운한 티를 내지 않는다. 나의 위기감과 불안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본인 같이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엄마, 엄마의 인생과 내 인생은 비슷할 거 같아."


어떻게 하다 그런 말이 나왔는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누워있던 엄마는 벌떡 일어나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런 말 하지 마."


가족 내의 불평등이 나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려는 엄마의 보호를 나는 안다.






이 글을 쓰며 주로 할머니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려왔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원망은 정작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되는 할아버지와 아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빠가 이 불평등한 구조와 문화에 무관하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그들은 그것들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잃을 게 없는, 아니 오히려 이득이 되는 진정한 권력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가만히 계셔도, 아빠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며느리의 역할은 할머니에 의해 요구된다. 그리고 엄마가 할머니의 요구를 수행했을 때 할아버지는 식사를 대접받고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받고, 아빠는 본인 부모의 돌봄과 가족의 대소사를 챙길 필요가 없게 된다.


어떤 권위나 권력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작동된다. 할머니는 불평등한 시스템의 규칙을 몸에 익히며 살아남은 실행자였을 뿐이다. 정작 그 시스템을 만들어낸 건 '할아버지와 아빠'의 집단이다. 그러니 지금껏 써온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어머니'라는 틀만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은 그것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여성들끼리의 갈등을 조성하고 '여적여'라는 프레임으로 위장하여 기울어진 구조를 은폐한다. 그 교묘한 권력의 작동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 속에 은밀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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