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설거지를 해 준다고 해도 거절할 때가 많다. 남편의 설거지가 좀 못 미덥기도 하거니와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나면
어쨌든 내 손이 한 번은 더 가야
마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내 살림을 꾸려보기 전에는 몰랐다.
살림을 꾸리고 안사람이 되어
집이라는 공간의 장악력을 얻어 보니
부엌이라는 공간은 주부에게 중심이었다.
싫든 좋든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곳.
주부 인생 40년, 시어머니와 부엌을 공유해야 했던 친정엄마는 시어머니를 분가시키고
생애 처음으로 '자기만의 부엌'을 갖게 되었다.
할머니의 분가 후 친정집에 들르니
엄마의 부엌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할머니가 욕심 내는 모든 살림을
엄마는 미련 없이 다 양보했다.
가장 애용하던 냄비는 물론이고
하나뿐인 압력밥솥도 할머니가 원한다며
싹 다 보내 버렸다.
이렇게 퍼 주는 스타일이 아니거늘,
그 마음의 후련함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부엌의 한 복판을 가로막고 섰던 김치냉장고까지 주인을 내 보낸 할머니 방으로 들여보내니
부엌이 뻥 뚫리고 집은 훤해졌다.
무쇠솥을 사서 그때그때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먹고, 누룽지도 긁어먹겠다고 한다.
아담한 사이즈의 뚝배기도 사서 조금씩 맛있게 찌개를 끓여 먹겠다고 한다.
물걸레 청소기를 몇 번 권했다만 굳이 그런 거 필요 없다던 엄마는 밀대를 알아봐 달라고 한다. 내가 그토록 원했건만 할머니가 거실과 텔레비전을 장악할 것이 뻔하다며 소파 들이기를 거부했던 엄마가 소파를 사겠다고 나선다.
혼수 준비라도 하는 듯 설레 하는 엄마를 본다. 어떻게 40년을 참고 살았을까.
하나의 부엌, 하나의 냉장고를
성격도 취향도 입맛도 다른 두 여인이 공유해야 했던 40년 세월이 새삼 짠하게 느껴진다.
얼굴이 밝아진 건 엄마뿐이 아니다.
할머니도 40년 만에 자기만의 부엌을 차지하고, 자기만의 냉장고를 가졌다. 본인이 싫으신 건 하나도 들이지 않고 취향에 맞는 음식만 들이신다. 고구마 찌고 감자 찌고, 늘 밖에서만 만나던 동네 친구도 집에 들이신다. 손님용 믹스커피와 종이컵도 한 구석에 쌓아드리고 왔다. 아흔 하나의 나이에도 여자는 자기 부엌이 필요하구나.
아이들을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잠시 맡겼다. 아이들 없는 틈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겨우 두 시간을 얻어 놓고 마음속엔 과부하가 걸린다. 가장 먼저 나는 냉장고를 연다. 부엌을 치운다. 내 삶의 중심이자 유일한 나만의 공간. 내게도 이곳은 나의 '작업실'이자 '홈카페'다.
일흔을 향해 가는 친정 엄마의 부엌에 설렘을 채워 주고 싶어 뭘 좀 사줄까 고민해 본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의 냉장고가 비어 있지는 않은지 전화도 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