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 읽으면 내가 읽지 뭐
"필명 특이하네요. 무슨 뜻이에요?"
소설을 연재하거나 발표할 때 나는 ELUSY라는 필명을 쓴다. 사람 이름인 듯 아닌 듯한 어감 때문인지 종종 필명의 뜻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혹자는 'elusive'라는 영어 단어를 가져와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정말로 그런 멋진 뜻을 생각하고 지은 거라면 얼마나 좋겠냐만, 허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아무 뜻도 없다. 정확히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이름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한참 기억의 잔영을 연재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출간 제의를 받았고, 필명이 필요하다기에 괜찮은 어감을 가진 단어를 즉석으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래서 종종 저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해지곤 한다. 뜻이 없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막상 필명을 만들고 나자 생각지도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다. 언젠가부터 컴퓨터 앞에 앉을 때면 본래의 내가 아닌 ELUSY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쓰는 건 분명히 내가 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가 불러주는 그대로 받아 적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마치 일상을 살아가는 자아와 이야기를 짓는 자아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작품이 쌓여갈수록 ELUSY의 이미지는 명확해져 갔다. 종종 자아가 구별되는 것을 넘어 타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마감한 지 2주만 지나면 다른 사람 작품처럼 느껴져요'라던 어떤 웹툰 작가의 말처럼, 시간이 흐른 뒤 완성했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내가 쓴 글이 아니라 나와 아주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가 쓴 작품처럼 느껴졌다. 마치 나 자신이 ELUSY라는 작가의 첫 번째 독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덜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안 읽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 읽으면 내가 읽지, 그런 마음을 가지자 심하면 며칠씩 걸리던 주제 정하기가 몇 분 만에 끝나는 기적을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의 내가 대중적이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적은 글감을 고르곤 했다면 ELUSY는 소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글감을 선호했다. 처음에는 옳은 변화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만의 색깔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LUSY와 마주한 건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이때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장르의 다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 본래 주 전공이었던 판타지나 로맨스를 벗어나 스릴러나 추리에까지 손을 뻗게 되었고, 나아가 일주일에 하나씩 아무 단어나 던져 그 단어를 주제로 단편을 써 오게 하는 방식의 모임을 만들어 '수련'을 하기에 이르렀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글을 쓰고자 진행한 프로젝트였는데, 학교생활과 병행하던 터라 무리가 되지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 관심이 적었던 SF 분야로까지 세계관을 넓힐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ELUSY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 조금 더 생각해서 멋진 의미를 담은 이름표를 달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필명을 가지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미래에는 어쩌면 ELUSY라는 단어가, 지금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멋진 의미를 담은 신조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