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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Nov 01. 2024

오래 그린 일기

때로 우울은 짙은 녹색의 형태를 띄웠다. 여름과도 닮은 그 녹색, 녹색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계절을 탓했다. 나는 변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변명에 해명하는 꼴이 되곤 했다. 사랑은 자해와 같다는 말을 가만히 더듬다 짙어지는 손끝을 바라본다. 초록으로, 더 짙은 초록으로. 밝았던 색도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 검은색이 되길 마련이었다. 어느새 검게 물들어진 손끝으로 오래된 일기장을 넘긴다.

버린 적도, 펼쳐둔 적도 없는 나의 일기장에는 누군가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다녀간 흔적들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을 붙여주자 흔적은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일기장 속을 휘집고 다녔다. 문장 사이사이를 가로지르고 문단을 마음대로 건너뛰며 단어를 부수고 문장을 깨트렸다. 고쳐보려고 펜을 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흔적은 깨진 문장들을 제멋대로 이어 붙여 새로운 문장을 만들고 단어를 교묘하게 바꾸며 일기장을 어지럽혔다.

흔적이 남긴 것들을 지우고, 지우느라 일기장은 어느새 새카맣게 변해갔다. 무슨 말을 썼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글자들의 뛰어놀지 않도록 일기장을 오래 덮어두었다. 혹여라도 일기장이 펼쳐져 흔적이 날뛰까 싶어 그 위로 책을 쌓고 또 쌓았다.

일기를 덮어두고 녹색의 늪에 빠져 오랜 시간을 떠올렸다. 참으로 길고 더딘 시간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언젠간 끝이 있을 거란 말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했다. 예고도 없이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는 오래 침묵했다. 딱딱하게 굳은 혓바닥 위로 쌓여가는 문장들. 다 깨부수고 싶었어, 흩어지는 문장들을 보고 싶었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한데 그러모아 문신처럼 몸에 새기고 싶었다. 보이는 대로 믿고 싶다는 간절함은 대체로 통하지 않았고 내 몸에 새겨진 것들만이 오로지 진실을 말했다. 난도질당한 몸 위로 또 다른 글자가 새겨진다. 대체로 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자해와도 같은 사랑 속에서도 녹색은 더더욱 짙어져 간다. 손끝에서 퍼진 녹색으로 내 얼굴을, 네 얼굴을 어루만진다. 살색의 살결 위로 녹색물이 번진다. 사랑이 짙어질수록 녹색도 짙어지고 네가 남긴 글자들의 자국도 선명해진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을 오래 코웃음 친 너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다.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이해한 너의 두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을 기억한다. 그 속에 비친 나는 너와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평생을 가도 나의 녹색을, 너의 녹색을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조금은 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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