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사월이다.
어제는 벚꽃이 만개했고, 오늘은 눈 같은 우박이 내렸다. 우박과 함께 벚꽃 잎이 힘차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갈이를 하듯 나뭇가지가 요란하게 흔들렸고 눈 같은 우박은 얼굴을 때리듯 떨어졌다. 맹목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모든 것들이 휘청거렸고 바람과 무언가 부딪힐 때마다 몸을 들썩였다. 왜 나왔을까. 나오지 말걸. 분명 이유가 있어서 나왔는데 날씨 때문인지 성가신 마음 때문인지 목적을 잃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고, 베란다에 들어온 햇빛을 보며 빨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래를 널고 창문도 활짝 열고 나왔는데 하늘이 꼭 두 개로 쪼개진 것처럼 반대편에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먹구름을 보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게 후회됐다가도, 폭풍 같은 바람이 불어댈 땐 우산이 있어도 무용지물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창문을 닫았다. 눈인지, 우박인지, 비인지 모를 것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닫자 그 소리마저 차단되었고 집안은 고요해졌다. 젖은 옷을 의자에 걸어두고 물을 한 잔 마셨다. 축축해진 머리는 아무렇게나 묶어버리고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도 며칠째인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 지독한 게으름 병에 걸리고 만 걸까. 몇 달째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은 소화가 되지 않고 가슴 언저리에 얹혀 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될까.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글로 마주하는 게 두려워 그 순간을 회피한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쉽게 손상되는지 너도 알지.*
문득 떠오른 문장을 메모장에 써놓고서 생각했다. 쉽게 손상되어 온 말들과 산산이 부서진 믿음들을. 그 말에 속고 또 속으면서 또다시 믿고 살아갈 나 자신이 한심해진다. 말과 마음이 전혀 맞지 않게 굴러간다. 어딘가 뒤틀리고 어긋났는데 그 부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마음에 박힌 말을 생각한다. 글자로 또박또박 새겨진 글을 생각한다. 그 순간이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눈앞에 없으면 그건 손상된 걸까. 사라진 걸까. 원래 없던 것들이었을까. 영원이란 영원이라는 단어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 그 영원에 갇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일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를 내다 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꾹꾹 삼킨 말들은 지옥 같다. 손상된 말을 들어도 이젠 아무렇지 않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 가벼이 넘기는 생각들은 결국은 고이고 고여 썩은 내를 풍긴다. 슬프지 않아, 울지 않아. 자처한 마음이 나를 가둔다. 뭐가 그렇게 널 두렵게 만들었을까. 시작이 뭐였을까. 원인을 찾고 싶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나를 잃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옛날 생각을 한다. 과거를 떠올리며 나를 찾는다. 시간을 돌린다면 언제로 가야 할까. 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결국 돌아올 미래가 오늘이라면, 겪지 않겠다는 게 결론이다. 사실 다 괜찮을 건데,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겁먹게 한다. 버림받는 게 아니라 벗어나는 건데 왜 나는 버림받고 싶지 않을까. 손상되기 이전의 말을 떠올리면 환상 같다. 환상 속에 잠시 살았던 기분이다. 서서히 깨진 환상은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내가 넘지 못할 크기로 콱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부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넘지 못할 땐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했다. 그 말이 내게 돌아왔다. 그제야 이해하는 마음으로 주먹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벌일까. 왜 스스로에게 그런 벌을 주고 방치해 두는 걸까. 오만하고 역겨운 말들이 좁은 공간에 쏟아져 돌덩이에 쓰인다. 그 위에 쓰인 글자들을 손끝으로 훑는다. 그 끝이 날카로워 손끝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그 말들을, 나는 왜 이렇게까지 간직해야 하는 걸까. 답을 내리지 못한 의문은 결국 내 곁을 맴돌았고, 나는 썩은 내가 나는 그 돌을 끌어안았다. 내 가슴 위로 쓰인 말을,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손상된 말이 빽빽하게 쓰일 때마다 숨이 막혀왔다. 숨이 막힐 때마다, 나는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다고 되뇌었다. 잘 지내고 싶었다. 손상된 말속에서 번번이 살아남고 싶었다. 이젠 안다. 말이 얼마나 쉽게, 가볍게 손상되는지.
* 백은선 시인의 ‘도움받는 기분, 비천의 형식‘ 시 속 문장에 영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