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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Oct 09. 2021

리유저블 컵으로 환경보호하는 당신께


북극 빙하가 다 녹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고, 남극의 최고 온도는 연일 갱신되어 작년엔 20도를 넘어섰다. 그런 가운데 한국에선 스타벅스가 50주년을 맞아 환경보호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며 리유저블 컵에 음료를 제공하는 이벤트를 했다. 그런데 환경보호를 한답시고 내놓은 리유저블 컵이란 따지고 보면 플라스틱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환경 보호가 목적이라면 매장컵을 이용하는 고객과 텀블러를 가져온 고객에게 혜택을 줘야하는 것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리유저블 컵이라는 구색 좋은 이름의 플라스틱 컵을 받기 위해 주문이 평소보다 수 배로 늘었고, 그것은 프리미엄까지 붙어 중고 시장에 올라왔다. 이 전후사정을 그 거대 기업이 몰랐을 리 없다. 환경 보호도 여전히 기업에겐 매출을 위한 마케팅 수단일 뿐이다.


이는 환경 보호라는 가치가 이제는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을만큼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전 세계는 탄소 중립을 위해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는 환경 보호를 실천하지 않는 기업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업은 환경 보호를 겸하는 생산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이 시점에 일반 대중들도 현대 사회 교양인의 조건에 '환경 보호'를 추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과대포장된 예쁜 쓰레기를 산다거나 텀블러나 매장컵을 사용할 수 있는데 굳이 리유저블 컵을 준다는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환경보호를 한다면서 왜 리유저블 컵보다 더 환경적인 방법을 실천하지 않는냐는 물음은 사실 내 자신에게 해도 무방한 질문이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왜 환경을 보호하는 더 나은 방법이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가?'에 대한 자기 반성이고, 그래서 불편한 이야기이다.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느낀 것은 화이트보드에 사용하는 보드마카 덕분이었다. 수업을 하다가 보드마카가 나오지 않아 그것을 교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다음 수업시간에 가보니 내가 버렸던 그 보드마카가 칠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제품이 같을 뿐 다른 선생님의 것이 아니냐고 이 글을 읽는 어떤 분은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이트보드는 내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 막 설치된 것이라 보드마카를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가지고 있는 선생이란 나 뿐이었다.


이건 분명 다 써서 그 때 버린 것이라고 말하니 학생들이 눈을 깜박이며 '아직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직접 써보라는 그들의 말에 뚜껑을 열고 마카를 사용해봤더니 멀쩡히 잘 나왔다. 그 때 실수로 잘 못 본 건지 의아해하면서 마카를 쓰다가 다시 마카가 나오지 않는 순간이 왔다. 이번에도 그것을 버리려고 교실 구석에 있는 박스로 다가가자 갑자기 모든 학생들이 소리를 내며 나를 만류하는 것이었다.



"왜?"

 

"버리지 마세요!"


"아직 나와요!"



아냐, 다 썼어. 나는 그것을 보여주려고 마카를 칠판에 마구 그었고 마카가 나오지 않음을 그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어떤 학생은 간절한 태도로 그것을 버리지 말라고 하며 자기한테 한번만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체 이걸 왜 달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손까지 뻗은 그 학생의 인상이 하도 강력하여 그것을 건네주었다. 그 학생은 그것을 받자마자 온 사력을 다해 마카를 아래 위로 소리나게 흔들기 시작했다. 조금 그러다 그는 그것을 화이트보드에 시험해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마카를 한번 화이트보드에 긋는데, 아. 좍-하고 마카는 다시 살아나고 말았다. 모두가 다시 나오는 마카에 환호하던 순간 나는 머리에 무언가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일화는 부국과 빈국이 물건을 소비하는 태도가 얼마나 극명히 갈리는지 보여준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물건을 더 쓸 수 있음에도 쉽게 버린다. 언제든 다음에 쓸 물건이 손 닿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물건을 더 써야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간절함의 부재랄까? 돌려말할 필요도 없이 두 글자로 낭비라고도 한다. 수십 년간 굳건했던 낭비의 라이프스타일이 그 한번의 충격으로 바뀔리는 없었고, 내가 진짜 생활에 어떤 변화를 주어야 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그 다음에 왔다.


내가 사는 간지라는 지역의 외곽에는 야생 치타 보호 구역이 있었다. 치타 보호구역에서는 2박 3일 동안 캠핑을 가는 일종의 환경 교육을 운영했는데, 이는 환경 동아리에 든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교외 체험학습이었다. 갈 의향이 있냐고 묻는 교장에게 나는 개의치 않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이웃 나라인 나미비아의 캠핑장에서 보냈던 밤이 쉽게 잊히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나를 휩싸던 사막의 채 식지 않은 공기와 손을 뻗으면 별을 한 움큼 쥘 수 있을 것만 같던 대자연의 밤!


하지만 차에 탈 때부터 슬픈 예감이 들었다. 찬란하고도 낭만적이었던 캠핑의 추억은 어쩌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4륜 구동 렌트카,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좌석, 사막의 살인적 온도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에어컨, 블루투스가 연결된 자동차 오디오에게 빚을 져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폐차장으로 갔어야 할 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이 차량은 내가 꿈꾸었던 그 대자연의 밤이 이번 2박 3일 동안 좀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조잡하게 개조하여 붙여놓은 좌석은 심하게 흔들렸고, 차의 앞문은 심지어 제대로 닫기지 않아 그 큰 문을 어떤 여자 선생님이 내려가 힘을 주어 꽉 당겨 닫았다.






노을 질 무렵에 도착한 우리에게 저녁 식사 전 짐을 풀고 샤워할 시간이 주어졌다. 캠핑장 직원이 물을 데우기 위해 아궁이에다 땔감을 태워야 하니 30분 뒤에 샤워장을 이용하라고 했다. 이 캠핑장은 가장 환경 친화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기에 온수가 꼭 필요한 때만 불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 말을 듣자마자 샤워장을 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애들이 샤워도 다 하고 속옷 빨래까지 마쳐 속옷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샤워장에 들어가보았다. 버스에서 든 직감대로 시설이 정말 좋지 않아 물이 제대로 나오기나 할런지 의구심이 들었다. 대리석 바닥은 군데군데 깨져있었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거미가 미동도 않고 있는 크다란 거미줄도 보았다. 누가 몸을 담글까 싶은 빨간 고무 대야가 떡하니 한 칸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어느 칸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칸에 들어가 빨간색 수도꼭지 밸브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온수다운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아궁이에 가보니 불길이 어느새 사그라들어 있었다. 30분 뒤에 샤워장을 이용하라고 해서 그 이후에 여유롭게 온수를 쓸 수 있을 줄 알고 1시간 뒤에 간 것인데, 그 30분 새에 물이 다 식어버린 것이다. 이런 곳에서 샤워를 할 순 없다며 귀신 나올 법한 샤워장을 뒤로 했다.


친환경 캠프인 이 곳의 수동 보일러. 땔감을 직접 안에 집어 넣는다. 치타 무늬로 꾸며놓은 벽면도 보인다.


벌써 어두워져 더 늦기 전에 남학생 숙소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해가 다 떨어져 깜깜해진 터라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어디까지 온 것인지도 전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어찌된 것이 캠핑장에 불 하나 들어오지 않을 수 있냐며 마음 속으로 불평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깜한 밤에다 피부가 까만 아이들이라 소년들이 거의 내 코 앞까지 와서 '마담!'하고 불렀을 때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깜깜한 암흑 천지 속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에스코트 해주다시피 한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 간신히 숙소의 문을 열었다. '야생 치타 보호구역이라는데, 치타가 나오는거 아냐?' 별별 생각을 하면서 공포스러운 암전을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딸각 문을 열고 보니 학생들이 좋다고 말한 그 숙소는 내가 걸어온 야외보다도 더 비교도 안되는 암흑의 공간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불 하나 없으니 당연한 이치일 수 밖에. 휴대폰 랜턴을 켜 간신히 스위치를 찾아 눌러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 캠핑장은 대체 얼마나 관리가 안되길래 메인 취침 숙소에 불이 나간 것도 여태 모르는 걸까. 숙소에서 다시 나오니 저 편에서 랜턴을 들고 숙소를 점검하고 있는 직원이 있었다.



"저 숙소에 스위치가 고장난 것 같은데요. 불이 안 켜져요."


"아직 발전기 돌린지 얼마 안 됐어요."



불이 안 켜진다는 요청 사항에 대한 답으로 스위치가 고장이 났다거나 혹은 당황한 채 문제 사태를 되묻는 답변을 예상하고 갔던 나는 '발전기 돌린지 얼마 안 됐다'라는 대답에 되려 당황했다. 발전기? 알고보니 이 곳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일몰 후 정말 몇 시간 동안만 제한해서 발전기를 돌리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해가 떨어지자마자 불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오던 캠핑장 랜턴이라던가, 오후에 도착해서 불을 켰을 때 아주 당연스럽게도 불이 켜지던 샤워실은 '발전기를 언제 얼마동안 돌릴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우리—대개 북반구 출신으로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으로 싸워야 하는—가 누리고는 있지만 이것이 실상 엄청난 특권과 혜택인 것도 인지조차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급상황이 되면 어린이와 노약자를 먼저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 보호라는 거대한 위기에서 더 많은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것은 개발도상국보다 위기 상황을 더 관리할 능력이 되는 선진국이다. 애초에 그들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엄청난 환경 파괴를 감행했으니 비용도 그만큼 더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부국의 시민 대부분은 화장실에 가면서 온수가 안 나올 걱정을 하거나 불을 켜면서 발전기가 돌아가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 그리고 항시 대기되어 있는 온수와 전기는 사실 쉼없이 일어나는 자원 소진과 환경파괴를 뜻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캠핑장 일대에 불이 들어왔다. 사실 숙소를 확인한 후에도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침대와 담요, 밝기 약한 전구 하나가 있는 어두컴컴하고 낡은 모습은 어린이 캠핑용 숙소라기 보단 포로 수용소 같았다. 나와 함께 숙소 곳곳을 바라보던 애들은 갑자기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별로 푹신하지도 않은 침대 위에 올라가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광란의 도가니를 만끽하는 것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것이라곤 불평말고  있을까?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처지가 다르고,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가난하게   없지 않느냐는 변명은  상황에  맞지 않다. 내가 누리는 모든 자원이 무한하지 않고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고갈되는 시점에선 지금의  편안함을 누군가는 내려놓아야 한다. 그럼  누군가는 과연 누구여야 하는가? 여태 누리고 살았던 자들인가,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자들인가? 리유저블 컵을 들어본  있는 문화시민이라면  답을 모를  없다.


저녁 식사 후 명목상 취침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런 밤에는 누구나 쉽사리 잠들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너무 큰 소란이 아니라면 아이들의 파티 나잇을 눈감아 주었다. 선생님들과 캠프 직원들은 모여서 모닥불을 피운 후 밀크티와 함께 본격적인 대화로 빠져들었다. 어차피 나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사람들은 늘 내가 대화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며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해놓고선 5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 모국어의 물결 속으로 빠져들었다―내 고개는 밤하늘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치타가 실제로 출몰하는 사막 부시의 한 가운데엔 인공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붙박이 별은 크고도 찬란하게 빛나서 마치 야광별 스티커를 붙여놓은 천장을 암전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내가 살던 세상엔 별을 가로막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고개를 오래 들고 있을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고. 그런데 희한한 것이 별을 바라볼 에너지는 없어도 별보다 환한 조명을 켤 다른 에너지는 넘쳐났다. 그 날 밤, 별의 소리를 들었다. 별들에게 물어봐, 같은 낭만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별은 그 날 ‘넌 큰일 났다’고 말했다. 특권을 누리는 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은 널 어쩌면 좋냐고 말이다.


별이 말한 큰일이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평불만의   이후 나에겐 또다른 큰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다같이  인근의 야생 새를 보러 나섰다. 동화책에서 나올 법한 진한 파랑색 , 진한 빨강색  등이 진짜 존재했다. 까치나 까마귀, 비둘기  새들만 봐왔던 삭막한 사람으로선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색감을 입힌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이 강렬하고 쨍했다.


그러다 애들이 내게 망원경을 건네 주며 저기에 독수리 Vulture가 있다고 손짓했다. 대체 어디에 독수리가 있다는 건지 한참을 헤맸다. 정말 한참을 응시해야 보이는 까만 점을 알아보기까지 애들은 답답해하며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이 곳에서 야생 올빼미도 난생 처음 봤다. 올빼미는 텐트를 치는 포인트가 되는 나무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 사진으로만 봤을 땐 좀 크고 징그러운데다 좀 못되어보이는(?) 새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아담하고 귀여운 새가 입만 삐죽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넋놓고 올빼미를 바라보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올빼미를 살면서 처음 본다는 사실을 넋놓고 들었다.


새 구경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잠시 쉬러 텐트에 들어온 나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인터넷에 휴대폰은 더이상 쓸모없는 물건처럼 여겨졌다. 나는 휴대폰을 베개 맡에 넣어버리고 눈을 감은 후 새 소리에 집중했다. 저녁엔 한국이었다면 아마 남겼을 법한 그저 그런 맛의 스파게티를 다 긁어 먹었다. 주어진 30분의 시간에 맞추어 감사하게도 온수 샤워를 하기도 했다. 떠나는 날 아침, 이를 악물고 얼음장 같은 물로 머리를 감으면서도 더이상 첫 날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물로 샤워를 하고도 쾌청하게 머리를 터는 동틀녘의 이들이 신비로워보였을 뿐이다.


얼마 전 석탄 공급 부족으로 정전을 겪는 중국의 기사를 보며 별의 평원에서 들었던 '넌 이제 큰일났다' 라는 소리가 기억났다. 내가 냉수와 암전이 흐르는 캠핑장에서 맞닥뜨렸던 질문들에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답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유럽의 국가들은 그들이 환경 파괴에 큰 책임이 있음을 알고 모든 생산 과정을 친환경으로 거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바꾸고 있다. 당연히 기업 자체적으로는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여러 조치를 취한다. 환경 교육의 선두격인 북유럽과 서유럽권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물건의 '소비' 자체에 큰 죄책감을 가지도록 교육한다. 사실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사용하고, 그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만큼 끝까지 사용하는 것이 환경 보호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물건을 안 사는 것이 환경 보호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모두는 지금 가진 것을 그대로 누리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선택이다.


그런 연유로 환경보호는 환경을 보호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라이프 스타일로 연결된다. 육식을 하지 않는 비건, 용기를 직접 가져가서 내용물만 구매하는 제로 웨이스트 샵, 용기를 직접 가져가서 음식을 테이크 아웃하는 물결이 한국에서도 작지만 생겨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리유저블 컵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최초의 다른 선택 하나가 누적되어 결국 삶을 바꾸리라고 확언한다.


내가 이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처음엔 이런 물로 샤워도 못하던 내가 지금은 옷을 단순 유행이라는 이유로 구매하지 않고, 아이스 커피는 역시 테이크 아웃 잔에 먹어야 제 맛이라던 내가 웬만해선 커피 테이크 아웃을 하지 않으며,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버리고도 남았을 로션 통을 박박 긁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별보다 빛나는 불야성으로 돌아와 온수와 전기 걱정 없이 살고 있을지라도, 내 삶이 작지만 바뀌게 된 것은 휴대폰 속에 새소리와 함께 박제된 그 날의 메모가 있기 때문일까.







치타가 나올지도 모르는 이 곳에서 나는 편안히 누워있다.


몇 번이고 올려다보게 되는 붙박이 별의 시린 바다 아래선 치타가 울지만, 낮에는 동화책 속 빨강파랑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곳.


네트워크 에러가 나는 이 곳, 소셜미디어의 알림만 뜰 뿐 클릭하면 페이지가 무한히 로딩만 되는 곳.


나는 이 곳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가난하게 살아도, 함께만 있다면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서 못 입고 못 먹어도, 저들을 보면 그저 웃음이 나서 이 생활을 싫어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진 것 없어도 주겠다는 이 곳의 마음에, 가진 것을 꽉 쥐고 남들보다 더 가지겠다고 허덕이는 내 욕심들이 가난하다.


노을이 그냥 붉은 빛인줄 알았는데, 이 곳에서 보니 노을은 불그스름한 자몽 진액에 이산화탄소의 청량함이 번진 색이다.


이 곳을 떠나도 잊지 말자. 노을은 사실 예쁜 자몽 탄산 음료색이지만 그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것.


Cheetah Conservation Camp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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