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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Oct 14. 2021

페미니즘 is 블랙

아직도 그 날의 침묵을 기억한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생 시절 원어민 강사가 자신의 이집트 여행을 소개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녀는 이집트 여성의 삶으로 주제를 확장시키더니 '성범죄 피해를 입은 이집트 여성의 비율이 이집트 전체 여성의 약 90퍼센트에 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을 따지면 100퍼센트나 다름없지 않냐며 그녀는 몹시 분개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강의실 내에서 분개한 것은 그녀 뿐이었고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구차하지만 여러 변명을 가져와  수는 있겠다. 페미니즘이 지금처럼 주된 화두가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원어민 강사가 영어로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의견이 있어도 분노하며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기는 수줍어서... . 단지 그런 이유였다면  날의 침묵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년이 지나 내가 생각한 침묵의 이유는  가지로 좁혀진다.  피해가 얼마나 막심하든 상관없이 그건 ''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곳의 알지 못할 불운한 누군가가 겪는 이야기.  


하지만 아프리카로의 도피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에서는 그 날의 침묵이 저보다 근본적으로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여기서 한번 더 정정할까 한다. 그 날의 침묵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론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론 그 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와 진배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만큼 나와 모든 이들에겐 문제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은 화를 내는 법 없이 느긋하고 따뜻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보통 시민의 얼굴에도 가려진 이면은 있는 법이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항상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문제라고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에 있다. 일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온 개인주의 이방인과 고립된 시골에서만 살아온 공동체 지킴이의 어쩔 수 없는 갈등이라고 하기엔 이 모든 경험은 그저 웃어넘기기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땅에서 일상적 문화라는 두꺼운 가면을 쓴 성폭력을 내가 어떤 태도로 지켜봤는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외로운 이방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 관심의 표현이 우리 기준에서는 다소 지나치기 때문에 초반에는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 사실 초반에 체감한 정도로는 ‘다소 지나치다’라는 완곡한 표현보다 ‘충격과 공포’라는 형용이 더 어울린다. 당장 이 곳에 온 첫 날부터 불쾌한 경험이 잇따랐다. 장을 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서 팔을 슥 만지고 태연히 가버리는 것에 몸이 뻣뻣하게 얼어버렸다. 위험 지역에 간 것도 아니고 대낮에 사람들이 쇼핑하는 마트에서 일어난 일이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몇 초 뒤에야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미 그 사람은 지나간 후였고 이런 일을 겪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 사건은 내 수난사의 미미한 시작에 불과했다. 운동을 할 겸 들고갈 수 있을 만큼만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전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험을 아마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동물적 직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한 눈에 봐도 눈이 풀려 있는 그 멀대 같은 남자는 내게 삿대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은 당연히 그가 빨랐고 대중 교통이라고 해봤자 아주 가끔씩 있는 택시뿐인 이 곳에 택시가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와줄 리도 없었다. 그가 간격을 워낙에 좁혀버린 탓에 나는 정차한 상태에서 창문을 열고 있는 남자에게 급한대로 다가갔다. 나는 그에게 저 남자가 나를 위협하며 따라온다고 하였고 한 눈에 봐도 선량한 시민으로 보였던 그 남자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주었다. 소리를 지르던 그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원래 저런 인간들의 특징인데, 발작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한다.


저 에피소드야 외국인이 겪는 설움 정도라 치자. 이 일상 자체가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알린 사건은 따로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옛날 같았다면 마음에 들어서 관심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용인해주던 일이다. 길을 가던 두 남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처음 보는 이에게도 인사를 하고 말을 거는 것이 이 곳에선 일상적이라 일단 대화에 응해주긴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방식의 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늘 대화가 이런 방향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싫다. 왜 싫느냐. 당신이 누군줄 알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냐. 우린 친구가 아니냐.


단편적인 문장으로만 읽어도 짜증이 치솟는 실랑이가 오가다 그들은 갑자기 나를 펜스로 몰아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집이 어딘지 알려달라. 찾아가겠다. 마침 우리집은 바로 시야에 잡히는 저 곳에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반사적으로 그들을 밀치고 나왔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바로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집으로도 갈 수 없다면 이 곳에 도망갈 곳이란 어딜까? 위협을 느껴도 피신할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그 날 처음으로 이 곳에 와서 울었다. 하지만 내 친애하는 친구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 했다. 내가 화가 난 채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것일 뿐 그들은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침묵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이었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서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이 나라 여자들도 그런 일을 겪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두번째 이유가 도출된 것이다. 늘상 있어오던 일이라 그들은 그것이 잘못인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선 피해자가 사실을 알리는 순간 내부고발자 취급을 당한다. 그 날 내가 동료들에게서 들은 말은 별로 없었거니와 들은 말 마저도 아주 뻔해 상처가 됐다.'니가 예민을 떤다'.


이런 류의 실랑이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한 탓에 나는 이 대화에 어느 순간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그 때마다 두려움에 떨어서 잉잉 울었다는 말은 아니고, 화를 내거나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을 돌려주었다.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공포감에 다리가 살짝 풀리기도 했다. 내가 어둠 속을 걷고 있었을 때는 밤도 아니고 저녁 6-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곳엔 가로등이 없는 지라 몹시 깜깜했다. 수도국 관공서 앞에 주차된 차가 몇 대 있었고 나는 그 옆을 지나쳐 걷고 있었다. 갑자기 창문이 내려가더니 차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 안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운전자가 있었다.


집이 어디예요? 그건 왜요?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여러모로 할 말이 없는 그 제안을 거절했으나 차는 걸어가는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따라왔다. 그는 계속 내 집이 어디인지를 물었고 차에 타라고 요구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과 차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CCTV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이 자가 나를 그냥 강제로 차에 태워간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목격자도 없고 길거리 위라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를 죽인 후 드넓은 부시 속으로 들어가서 시체를 아무데나 버리면 된다. 어차피 사람들은 거기까지 가지도 못할 것이며 내 시체는 야생동물들이 먹어 치울 것이다. 내가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무력감이 들었고, 바로 이것이 이 곳 여성들이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가장 거대한 장벽이 아닌가 싶었다.


평소에 예민하다는 말도 들어본 적도 없고, 하늘 아래 만사태평으로 자부하던 나는 샤워를 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꼭 거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샤워를 하다가도 도중에 여러번 나와서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들어갔다. 어느 날은 만에 하나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 무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가위를 침대 아래에 밀어넣기도 했다. 극심한 폭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일상 속에 파고든 불안이 이렇게 정신을 해친 것이다. 결국 나는 3학기에 사설 보안 업체에 연락해 비상 버튼을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까진 임시 거주민인 외국인 여성의 삶이고, 이것만 봐도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 한 성별은 이런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하나 싶지만 이 정도의 삶도 내가 치안이 좋은 동네에 살았고 사적으로 보안을 강화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다. 진짜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여성의 삶이란 이렇다.


세나틀라는 이웃 속 선량한 시민의 표본이며 나를 반성하게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아이 4명을 혼자 먹여 살리는 일이 절대 녹록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가진 것이 많다면 오늘 하루 먹을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잃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며 사는 삶의 태도가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한 가지 인상 깊은 점은 그녀가 늘 '불장난 하지마라, 그러다 홀랑 다 탄다'라는 보츠와나의 속담까지 인용하여 남자 조심을 신신당부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3학기의 어느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틀, 사흘, 하루하루가 흘러가도 별 소식이 없어 개인 사정으로 어디 멀리 다녀오겠거니 했는데, 마후뿌가 그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다.



"세나틀라 다쳤어."


"어디를?"


"머리가 찢어졌어."



그 후 들려오는 이야기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분노스럽지만 이 나라에서 그렇게 특이한 경우도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세나틀라의 집에 우편 배달을 왔다며 누군가 찾아왔고, 문을 열어준 세나틀라의 머리를 그가 둔기로 내려쳤다.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세나틀라가 가장 최근에 사귄 전 남자친구였으며, 세나틀라의 4명의 아이 중 1명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여러번 되묻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재차 확인했다. 전 남자친구가, 심지어 둘 사이의 자식도 있는 아버지가 세나틀라를 속여 문을 열게한 후, 머리를 둔기로 내려치고 도주했다는 것. 세나틀라가 그렇게 남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던 것은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는 약 2주 후에 학교에 나왔고,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안색부터 살폈다. 다행히 외관상으로는 크게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세나틀라는 크게 다친 곳은 없고 정신적으로 놀라 좀 휴식이 필요했다고 했지만, 머리를 꿰맨 곳을 보러 오후에 병원을 가야한다고 했다.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기억이라 나는 그 사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나틀라는 웃으며 자초지종을 먼저 이야기해 주었다.


이제부터 그의 전 남자친구를 범인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범인은 세나틀라가 임신을 한 후 집을 나가더니, 나중엔 다시 자기를 받아달라며 돌아왔다. 사람 좋은 세나틀라는—천하의 쌍놈들이 마음씨 여린 사람을 등처먹으려고 하는 것은 만천하의 이치다—이미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그를 다시 받아주었다. 하지만 또 싸우고 집을 나가기를 반복했고, 그런 인간들이 그렇듯 범인의 폭력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동거 생활 중에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폭력은 일상적이었기에 문제시하지도 않고 매번 참고 넘어갔다.


공권력에 호소를 해봤냐고 물어보니 세나틀라가 한 대답은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애인들끼리의 문제니 알아서 해결하라, 뭘 이 정도로 예민스럽게 신고를 하냐, 좋게 좋게 해결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헤어지자고 했다가 앙심을 품은 남자가 심각한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은 세나틀라의 경우 외에도 여러번 들려왔고, 사람들은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도 이야기의 전개를 다 알아맞힐 만큼 그런 일들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 한국에서도 데이트 폭력 및 가정 폭력 사건은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 보도되니 한국이 확실히 낫다고 자신하기도 어려운 세태가 기가 막힐 뿐이다. 인류의 절반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은 언제쯤 끝이 날까.


대학 시절 이집트 여성 거의 대부분이 성폭력을 경험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아무런 감흥이 없을 정도로 세상의 폭력성을 몰랐던 나는 집을 알려 달라는 어떤 이의 끈질긴 요구에 울기도 하다가 결국 이렇게 변모했다. 참혹했던 현장에서 무사히 돌아와준 세나틀라와 내가 그 날 서로에게 건넸던 격려는 이런 것이었다.



“야박하다고 생각말고, 사람 믿지 마세요. 4명 아이들은 어떡해요.”



세나틀라는 내 두 손을 꼭 잡아주더니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나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4명의 아이를 지켜야만 하는 그녀의 환경에 더 감정이 이입되어 그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킴, 그 순간에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흉기를 든 그 놈과 맞서 싸우고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세나틀라는 말하고 그 말을 듣는 내 표정은 수심에 쩔어있었다. 그녀가 범인은 도주한 채로 현재 수배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나는 집에서조차도 불안을 느끼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가 공동운명체 같이 느껴졌다.



“제가 기도할게요. 앞으로 별 일 없기를.”


“킴도 기도를 하나요?”


“전 종교 없어요. 그렇지만 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할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여성을 향한 폭력의 역사는 길고도 유구하다. 괜찮다는 세나틀라의 말을 듣고도 사실 괜찮지 못했으나, 일련의 일들을 겪고 우리는 눈 앞이 캄캄한 이 폭력의 현장을 같이 헤쳐나가야만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생긴 것만 같았다.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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