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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Oct 18. 2021

도피의 끝에 천국이 있다


하루를 들여다 보면 아무런 변화도 없고 시간이 잘 가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게 모인 세월은 어느새 훌쩍 가 있다. 태블릿에 완전히 적응해 알아서 서로 도와가며 컴퓨터 실습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할 몫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떠날 때가 되어서 드는 시원섭섭함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년이라는 기간은 장기 파견으로 분류되지만 2-3년씩 되는 파견에 비하면 적응할 만하니 돌아간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상상해보았다. 그냥 평소처럼 수업을 하다가 '얘들아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를 외치고 가도 되는 걸까. 사실 그것이 일반적인 작별 인사겠지만 그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시간을 보내다가 때가 되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학생들이 큰 변화를 보여주었던 컴퓨터 수업으로 암전의 상태에서 첫 전원을 켜는 것이 발전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직접 지켜 보았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고비를 넘겼고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든 수업을 보며 내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질문을 일깨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도피를 감행했고, 이 도피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컴퓨터 수업도 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대회 참여와 정규 수업 편성을 먼저 제안했고 내가 받아들였기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랬기에 이 곳에서의 내 마지막 모습이란 누군가가 제안해서 한 일 말고 내가 스스로에게 제안하고 싶은 일년의 마무리여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느꼈다. 나는 이 곳으로의 도피를 스스로 선택했으나 그 땐 도피를 하기만 하면 그 끝엔 무언가가 보일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도피 끝에 다다른 곳이 황무지라는 것을 알은 지금에서도, 나는 이 황야의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이 곳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파견 경험자 선생님 한 분이 '넷플릭스'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거긴 정말 할 게 없어요. 영화를 실컷 다운 받아 오세요. 문화 생활이라곤 전무한 이 마을에서 영화관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관에 가는 것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누구나 어릴 적부터 쉽게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영화관은 오직 수도에만 있는데다 영화관람료도 우리나라와 별 다름이 없으니 이 나라 사람들의 평균 소득에 비하면 매우 사치스러운 오락거리다. 이 지역을 평생 뜨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평생동안 영화관이나 영화라는 것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와 토토는 마을 유일의 영화관인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영원한 친구가 된다. 나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속성 때문이다. 재미와 감동이 끌어당기는 상상의 자유와 몰입은 모든 이를 하나되게 한다. 선진국의 현대인들은 영화관에 처음 간 날의 짜릿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켜지면 그 안에서 펼쳐지는 또다른 세상. 우리가 누리는 취미 생활 중 재미와 감동을 그렇게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몇 없다.


주인공은 이 곳 사람들, 배경은 이 동네로 한 인디 스마트폰 영화는 그렇게 ‘그러고보니 여긴 영화관이 없다’ 라는 생각 한 줌에서 시작되었다. 예상도 계획도 한 적이 없어 내 손 안의 장비라곤 구식—심지어 일찌감치 단종된 모델인—스마트폰 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래 독립 영화의 의미란 결과물이 조잡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우리가 이것을 하고 있다는 데에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종합 예술의 정수인 영화는 수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매진해도 될까 말까한 작업인데 이를 그것도 경험이 전무한 내가 혼자 진행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앞으로 컴퓨터 수업과는 비교도 안되는 또 한번의 고생길이 예약된 것이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시간적 제약 앞에서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과제를 옆으로 제껴두었다. 아마 1, 2학기 같았다면 누군가가 제안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소수의 인원으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철저히 내 자유 의지의 발현으로 우리들의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 하나를 위해서. 공간 내 모든 이가 함께하는 예술적 체험의 순간, 불이 꺼진 순간 보이는 새로운 세상에 내 친구와 내 교실이 전혀 다른 낯선 의미를 갖고 등장한다면 그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짜릿함일까.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모든 선생님께 협조를 구한 후, 내가 가르치는 6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대로 각 반의 꾸러기들이 자기를 캐스팅해달라고 난리였다. 오디션이라고 해봐야 대사도 필요없이 어떤 행동 하나면 족했다. 캐스팅 된 학생들은 물을 시원하게 마시는 모습, 보드마카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 등을 선보이고 뽑혔다. 6학년 아이들 모두를 알고 있었기에 누가 적합할지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다 뽑고 보니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아이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뽑힌 이유를 바로 납득했다.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매력과 끼가 이 정도까지인지는 몰랐다고나 할까.


나는 학생들과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영화에서 영어를 담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엔 '세츠와나'라고 불리는 예쁜 모국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언어를 모르는 내가 대사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데다 아이들에게 영어 대본 몇 장면을 시켜보니 자기의 능력을 100퍼센트 펼치지 못하고 훨씬 뻣뻣해졌다. 입에 붙지 않는 영어인데다 이것을 외워서 말해야한다는 압박이 표현의 자유를 갉아먹었을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만 설명해주기로 했다. 대사 없이 배우가 알아서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영어 아닌 세츠와나어가 울려퍼졌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는 것이니 연기가 자연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아프리카의 한 초등학교,
두 소년 메모리와 오뻰쩨는 짝사랑 중이다.
미스킴 선생님의 이상한 습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두 소년은
마침내 고백을 결심하는데.

이들의 사랑,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관이 없는 이 곳 학생들에게 영화 관람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영화를 찍는 과정은 즐겁다고 흔쾌히 말하기 힘들었다. 40도에 육박하는 사막의 태양 아래 기력이 빨리 소진되는 것은 물론이요,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는 학생들 때문에 나머지가 다 좋음에도 불구하고 NG컷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배경을 학교로 잡은지라 학생들의 학교 일과 중에 촬영을 진행했는데, 촬영이 학교 수업에 지장을 주면 안되므로 쉬는 시간마다 기다려 5분-10분 동안 급히 찍었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굉장히 흔들렸거나, 각도가 아쉬운 장면들이 많다. 철저한 계산과 여러 명의 노력으로 찍을 수 없어 나 혼자의 힘으로 게릴라성으로 찍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으므로 미련은 없다.


S# 친구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메모리


많은 인원이 필요한 쉬는 시간 장면은 진짜 쉬는 시간에 촬영했는데 그 많은 인원을 통제할 수 없어서 NG가 나지 않기를 순전히 운에 맡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극도로 제한된 시간 동안 찍은데다 별다른 장비도 있지 않았기에 결과물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초에 나의 목표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다같이 관람하면서 즐겨보자는 것이었으므로 12월 초가 될 때까지 편집을 아주 간단하게나마 모두 마쳤다.


S# 오뻰쩨를 바라보는 태리소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피부를 지져가며 영화를 찍을 때까지만 해도 찍기만 하면 고생이 끝날 줄 알았다. 한국이었다면 고난과 역경이 영화 편집을 마치는 지점에서 끝났겠지만 무엇이든 거세고 예측 불가능한 이 곳에선 달랐다. 영화를 다 찍고 보니 이 곳엔 영화'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 만드느라 여태 지쳤는데 이젠 영화관까지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실컷 영화를 만들었는데 영화관이 없다는 이유로 못 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에너지가 이미 고갈되어 평소 같았다면 무척 짜증이 났을테지만,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선지 담담하게 방법을 찾았다.


S# 고백을 준비하는 오뻰쩨



천운이 따랐는지 3학기 막판에는 공사로 온갖 물건이 다 쌓여 있었던 컴퓨터실이 싹 정돈되었고, 나는 허락을 구해 그 곳을 영화관으로 만들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하는 일이라 손이 정말 많이 갔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학교 스태프들, 내 절친 타마포와 마후뿌까지 가세해 손쉽게 영화관을 만들었다. 이들은 나를 오며 가며 '조금' 도운 정도가 아니라 누구 하나 없어서는 안 될 도움을 주었다. 학교 창고 구석에 처박힌 빔 프로젝터를 찾아 꺼내준 것, 집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스피커를 빌려준 것, 45개쯤의 의자를 모두 가져와 이 곳에 깔아준 것 모두 내 친구들이 나를 위해 해 준 일이다.



S# 여학생을 기다리는 메모리




대망의 시사회



상영회를 하기 직전, 뭐 때문에 허전한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영화 감상의 백미인 간식이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6학년 전체의 간식 구매를 위해 세나틀라와 마후뿌가 흔쾌히 손을 빌려주겠다며 나를 따라나섰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상영회 준비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몇 개월간 작업했던 이 결과물은 학생들이 마지막 학기를 마친 후 우리들만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학생들은 영화를 보는데 내가 간식을 준비할 것이라곤 생각을 못했는지 함박 웃음을 지었다. 한명씩 줄을 서서 들어와 나와 악수를 하고 간식을 받아갔다.



어떤 나라에선 흔하디 흔한 취미이자 오락이 영화 감상이겠지만, 이로써 우린 그것을 넘어섰다. 우린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우리 동네가 영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함께 봤다. 친구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고 꼬마들은 깔깔 웃었다. 아마 이들 중 누군가는 앞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게 되겠지만, 대부분은 이것이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본다고 할 지라도, 영화를 만드는 경험은 일생에 몇 없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엔 모두의 이름이 다 들어갔다. 6학년 학생의 이름 모두, 날 도와준 학교 동료들 모두의 이름이 줄줄이 올라간 순간 우리들의 만남에도 마침표가 찍어졌다. 나는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그동안 즐거웠다고 말했다. 사람의 인생에서 '절대로'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몇 없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올 한 해의 기억을 사는 동안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구슬프게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멀리서 온 내가 돌아가면, 영원히 나를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들을 안아주며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살다보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원할 것 같은 사막의 열기도 새벽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가끔은 지루했고, 그래서 더더욱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미스킴과 학생들의 좌충우돌은 여기서 엔딩 크레딧을 올렸다.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 학교 사람들은 내게 축제를 열어주었다. 그 날 나와 학교 사람들은 모여서 모닥불을 피우고, 맥주를 사러 가고, 직화로 고기를 구웠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젊은 선생님 두 분이 나오시더니, 일년 동안 수고한 미스킴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라 깜짝 놀랐지만 나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앞으로 나갔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치는 박수 소리가 밤하늘 아래 울렸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문득 한국을 떠나기 전에 왜 그 먼 곳으로 가냐고 사람들이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겹다'라는 한마디로 그 모든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던 그 때.


내 검은 친구들이 귀를 기울이는 앞에서, 마치 내 조국의 어떤 이들에게 대답하듯이 어둠 속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엔 모든 것이 다 지겨워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제가 선택한 일이기에 무척 의미있는 모험이었습니다.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봤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1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가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멀리 다녀온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신물이 나 있었던 일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내게 아프리카가 어땠냐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착각할 만큼 여전한 일상을 살았다. 사람들의 질문에 많은 이야기를 고작 몇 마디로 풀어내긴 역부족이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 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나도 딱 그만큼만 대답했다. 질문 공세가 수그러들기 시작할 때부터 중국에서 신종 질병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들려오더니 갑자기 세상은 문을 꽁꽁 걸어잠갔다.


불과 얼마 전 전기도 없는 교실에서 오직 칠판과 분필만으로 수업을 했는데 이 곳에 오자마자 학교는 모든 것이 다 갖춰진 교실을 두고도 집에서 원격 학습을 시작하고 있었다. 교실엔 전기도 없고,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고, 샤워기도 없어 양동이로 샤워를 하던 나는 한번에 수 십년의 세월을 건너 뛴 느낌에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이 진짜 현실이 맞는지 가끔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시네마 파라디소가 불타버렸듯이 나의 시네마 천국도 불타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이제 그것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나를 그렇게 만류했고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그 때' 그 경험을 한 것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한다. 그 때 내가 도피하지 않았다면 여태까지 풀어놓은 이 모든 이야기들은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미루었다면 결국 가지 못했을 것이다. 미룰 때는 다음에 가지 뭐, 라고 생각하지만 세상 일이란 어떻게 될지를 몰라 그 다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언제인지, 오기는 하는지 기약할 수 없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던 세나틀라와 스빠라라. 마지막 티타임.


이제 집에선 새소리와 박쥐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실내는 언제나 최적의 조건으로 유지되어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 집에서 편안하게 누워있노라면 떠나기 전과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만 같다. 하지만 눈을 떠보면 내가 달라졌기에 모든 세상이 바뀌었음이 보인다. 피부에 각인된 엄청난 양의 기미와 가시나무에 그인 상처가 내면의 변화를 외로이 증명해주고 있다. 가끔 엄마는 사막의 무자비한 흔적들을 보고 여자애가 피부가 이게 뭐냐고 핀잔을 주지만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여자애가~'로 시작되는 모든 말들이 그렇게 중대했다면 난 애초에 그 곳에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강렬한 태양 아래서 사막의 땅을 횡단하는 이들에게 그런 것은 문제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도피 끝에 나는 황무지에 다다랐다. 황무지에 무엇을 세울 지는 내 손 끝에 달려 있었다. 지겨워서 도망쳐 온 자에게 무슨 에너지가 있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만약 당신이 도피를 감행했다면, 그 선택만으로도 당신은 무언가를 스스로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절박했기 때문에 도피했고, 그 절박함이란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찾고 싶은 갈증에서 오는 것이다.


나는 도피의 끝에 시네마 천국을 세웠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되며, 가끔은 지지부진하여 화도 났지만 내 손 끝엔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유가 있었다. 그 모든 힘들었던 과정도 내가 스스로 쌓아올렸기에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기화될 수 있었던 곳, 그 곳이 천국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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