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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유학생 Apr 03. 2020

4시간 30분의 고속도로를 뚫고

눈물의 수시 전형

 지윤아. 아빠 보낼게. 조금만 기다려라


  대입 수시 시즌이었을까. 수시 전형 지원 횟수 제한이 없었던 12년도 대입을 위해 자소서 생산 공장이 되어 달리던 초가을,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수시 전형 지원을 위해서는 자소서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해왔던 스펙과 관련된 원본 서류를 서류봉투에 담아, 우편으로 대학교 입학처에 전송한다는 사실을 마감 전날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분명 자소서는 다 썼는데.. 우편으로 꼭 제출해야만 하나요?” 사실이 믿기지 않던 나는 진학사 등 접수 페이지를 닫았다. 마감을 앞둔 몇몇 대학교의 입학처에 전화했다. 사실 확인을 하고 나자 내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전자 제출이나 결재 시스템이 보편화되지 않은 나름의 아날로그 시대였기에 눈 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로, 소리 없이 학교 3층 화장실에 들어갔다. 고3인 나의 교실은 5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또 혹여나 누군가 나의 우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나 소리 없이..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나의 모든 고등학교 시절 해왔던 활동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관련 서류들이 모두.. 울음이 끊이지 않았던 화장실로부터 283km의 4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곳. 대구 본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감날까지 입학처에 서류가 도착하려면 오늘 지금 내 손에 모든 증빙 자료가 있어야 했고, 그래야 나는 합격의 문을 두드릴 빛을 잡을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가에 갈 수 없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그 빛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울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뮤지컬 기자단, 교육 봉사, 페스티벌 운영 봉사, 매주 주말에 나가서 봤던 텝스 시험. 마마걸이었던 내 중학교 시절과는 달리 고등학교 쌓아왔던 그 모든 활동들은 온전히 내 손 안에서 이뤄진 일들이었다. 근데 그 3년간의 나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고?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던 19세의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종이 치자 3층에 있던 다른 학년 친구들이 하나둘씩 교실에 들어갔고, 울고 있던 화장실 칸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교복 주머니 속에서 폴더 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했다. 그때만 해도 학원가에서 일하느라 너무 바빴던 엄마였기에 죄송스럽기는 했지만, 용기를 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 엄마에게 지금 내가 직면한 고민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 사실..”

  사실 무서웠다. 넌 그걸 미리 안 챙기고 뭐하냐. 넌 왜 이리 꼼꼼하지 못하냐 라는 대답을 들으면, 내 마음이 더 속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리 챙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라는 끝없는 후회가 내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고, 엄마한테 혼날 것 같은 그 두려움 또한 온몸으로 번져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반전으로 다가왔다.

 

 “지윤아. 아빠 보낼게. 조금만 기다려라”


  예상과는 달리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짧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아빠에게 그 많은 서류를 챙겨, 직접 자가용으로 고속도로를 뚫고 내 편에 전해주겠다는 엄마의 결정이었다. 나를 타이르는 말 조차도, 잔소리 조차도 하지 않았다.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이 한 번의 일로 또 다른 고3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약 세네 시간 정도 지나서였을까. 그렇게 아빠는 약 283km의 고속도로를 뚫고 학교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짜증하나 없이 서류 뭉치를 넘겨주시며,


 이거면 되었제? 힘내라

 

 한 마디를 남기셨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아빠에게 더 이상의 말을 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빠는 그걸 전해주고 난 직후 바로, 고속도로를 달려 대구 집으로 출발하셨다. 서류 뭉치를 받았던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수많은 고등학생의 흔적이 쌓여있는 그 서류뭉치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또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경기도로 홀로서기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대입의 고통이 이렇게 서러웠을까?"라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그리고 나의 실수를 전혀 탓하지 않았던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 어린 마음에 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때 그 화장실 한 칸에서의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그리고 서류 봉투를 넘겨주던 아빠의 손길이 생생하다. 그 날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위치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4시간 반의 283km라는 길고 긴 아빠의 고속도로 위 운전이 20대의 내 삶을 바꿔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긴 드라이브와도 같은 내 인생에서 그 날 아빠가 잡았던 운전대는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만들어줬고, 내 인생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큰 발판이 되었다. 서러웠던 그때의 눈물 자국이 여전히 잊혀지지 않아서, 그리고 그 눈물 자국을 내 용기와 임기응변으로 지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순간의 내 모습이 생생해서. 그래서 늘 마음 한 켠에는 대입에 대한 작은 짠함이 남아있다. 20대가 된 이후에도 사회생활이 힘들어 나 자신을 견디지 못해 화장실로 도망가서 혼자 소리 없이 울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일 때면, 나는 그 당시의 울음을 참지 못하던, 울음을 숨기고 싶었던 19세의 내 모습이 생각나 더욱더 눈물을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울음을 가슴을 품고 오늘도 내일도 웃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다. 그 때의 내 눈물과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또 이 자리를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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