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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Sep 23. 2020

때로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합니다

디자이너의 개인 작업은 언제나 짜릿해


어제 채택되지 못한 시안들에 대한 짧은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이전 작업들을 뒤적이게 되었다. 내가 뭘 해왔더라.. 하면서 이 폴더 저 폴더를 들락거리다가 내 시선이 향한 곳은 ‘my’ 폴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들이 아닌, 그러니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만들었던 개인 작업 창고 같은 폴더이다.

그중 대표적인 건 아무래도 책. 직접 디자인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다녀왔던 여행기를 글로 써서 책을 만들었다. 독립출판 형태로 출판을 하려다가 막판에 출판사에 유통 대행을 의뢰했다. 출판사에서 재고 관리와 온/오프라인 서점 유통을 대신해주는 방식. 2019년 2월에 공식 출간되었으니 이제 1년 반 정도 지났다. 결과라고 하기엔 아직도 판매 중이긴 하지만, 출판사 창고에 내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될 것 같아 죄송한 마음. 많이 팔리지 않아 조금은 슬프다.(역시 판매는 어려워)

그때 책을 만들면서 펀딩을 같이 진행했었다. ‘텀블벅’을 하면서 브런치 계정도 처음 만들었다. 뭔가 홍보가 될 것 같아서. 펀딩을 준비하면서 굳이 안 넣었어도 크게 상관없는 리워드 상품을 만들었는데, 그건 바로 ‘런던 지도 포스터’였다. 런던에서 5일 동안 여행하며 다녀왔던 곳을 포함해 다녀오지 못한 곳, 다녀오고 싶었던 곳 등을 기록하고자 본문에 지도를 그려 넣었다.


본문에 실려있는 런던 지도 일부. DAY1~DAY5까지. 갔던 곳, 가고싶은 곳을 추려넣었다.



런던 지도 그래픽 같은 것은 무료로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그래픽 중 하나다.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건 그만큼 무료 소스도 많이 나와있다. 거기서 조금 더 디테일한 걸 찾고 싶으면, 그냥 돈 주고 사도 된다. 하나 정도 구입하는 건 그리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근데 이건 내 책이잖아. 내가 글쓴이고 곧 이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인데. ‘내가 준비하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손으로 만들 거야!’라는 괜한 욕심으로, 결국 나는 지도를 직접 그리게 되었다.


지도의 배경 작업을 그리는 일은 사실 끈기만 있으면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일단 지도를 밑에 대고, 하나하나 그려내면 되니까. 일종의 막일(노가다)이나 다름없다. 일이 없는 날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런던의 도로를 열심히 그렸다. 큰 대로변에서 골목까지, 거의 대부분을 하나하나 패스 툴로 그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도로가 생기고 공원과 강이 생겼다. 거기에 도로명을 넣고 지하철을 넣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곳곳의 명소들을 아이콘 작업까지 해서 넣었다.


런던 지도가 만들어지는 과정.gif (pc는 클릭해야 보여요)


와우. 지금 보니 이걸 왜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다시 든다. 분명 그때도 문득문득 들었던 생각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혼을 담아 하고 앉아있는 거지? 너무 쓸데없이 신경을 많이 쓰나? 이런 생각들. 게다가 펀딩을 위해 지난 2019년 2월에 이 지도 그래픽을 만들고 난 후에도, 나는 지도에 나온 아이콘 32가지 중 유명한 명소 몇 가지를 살려 스티커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스스로 너무 귀여운 것 같아 판매를 해볼까 싶어서 따로 제작을 해서 포장까지 해두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집에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이렇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한다. 디자이너에게 개인 작업은 언제나 짜릿하다. 재밌다. 신난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이런 짜릿함과 즐거움은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아서 하는 일로는 느끼기 어려우니까. 같은 회사 내에서 디자인 부서로 있었다면 되든 안되든 싸우기라도 해 보지. 프리랜서에겐 그런 건 없다. 어쨌든 고객만족이 우선이어야 할 뿐이다.

 


재밌으면 된거 아닌가.



사실 이 작업의 결과물이 이어서, 그 성과가 자연스럽게 판매라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 이 책을 처음 만들기로 마음먹은 그 시작부터 직접 내 손에 온 끝까지 모든 과정이 즐겁고 짜릿했는데. 작업자인 내가 만족했으면 됐지, 첫 술에 어떻게 배부를 수 있겠어. 어쨌든 나는 이 작업으로 한 단계 성장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니,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지도에 들어갔던 32개의 런던 명소 아이콘, 그리고 스티커 작업으로 추려낸 아이콘들



책을 입고했던 몇 군데 독립서점에 재입고 문의를 넣었다. 소량이긴 하지만 몇몇 남아있는 지도 포스터와 스티커 등을 책 판매 시 같이 추가로 증정하고 싶다고.  모든 작업은 어쨌든 책에서 파생된 작업들이니까. 아직 우리 집 책장에 쫙 진열돼있는 내 책들이 이제는 지속적으로 서점에 입고될 수 있도록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계속 이어가야겠다!








혹시 이 책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쯤 검색해보셔도 된답니다 :)

http://www.yes24.com/Product/Goods/69479746

(구매해주셔도 좋아요, 속닥속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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