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디 Oct 20. 2020

안정적이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아

현실 속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디자인 에이전시를 꿈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재수생 시절에도 오전엔 아르바이트, 오후엔 미술학원, 밤과 틈틈이 수능 공부를 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그 생활은 계속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춰 수강 신청을 하느라, 솔직히 대학은 겨우 졸업한 느낌.


휴학도 없이 4년을 쭉 이어온 내게 졸업 이후 진로인 ‘취업’은 굉장히 중요했다. 불과 25살의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집안 사정상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취업 준비를 한 건 없었다. 막연하게, 혹은 멍청하게도 그때의 나는 졸업하면 다 디자인 에이전시로 취업해서 디자이너가 되는 건 줄 알았으니까.


취업에 대한 뚜렷한 계획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늘 디자인 에이전시에 가고 싶었다.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회사들의 포트폴리오는 매번 나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선망하던 에이전시에 면접도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지 못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적은 연봉과 잦은 야근과 철야에 버틸 수 있겠냐는 면접관의 첫마디에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말에 바로 ‘네!’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거스르고 도전해 볼 용기가 솔직히 나질 않았다.


그렇게 아쉽게 결정을 내렸음에도, 결국 나의 첫 직장은 편집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디자인 에이전시에 대한 미련(?)은 못 버렸지만 지난번 면접 때 회사보단 덜 힘들 것 같았다. 나는 매일같이 반짝이고 북적이는 홍대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일했다. 재수까지 하며 싶었던 홍대는 결국 가지 못했지만, 매일같이 홍대입구역에 오르내리며 출퇴근하는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어쩌면 부러웠던 거겠지.



디자인 에이전시를 포기하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업무에 막차 시간에 맞추느라 매일이 조마조마했지만, 지하철이 끊기는 날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했다. 홍대에서 경기도 집까지 택시비는 꽤 나왔던 것 같다. 그 당시 2~3만 원쯤. 무려 11년 전.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느라 썼던 비용은 그때그때 회사에서 챙겨주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이 나를 부르더니 ‘집에 가는 길도 먼데 야근하거나 하면 근처 찜질방을 이용하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그때 처음 ‘이렇게 까지 해서 다닐 회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말 악바리가 되어 버텼어야 하는데, 이러다간 심신이 먼저 지칠 것 같았다. 디자이너로서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다닐 회사인가 싶었다. 그 당시 내 월급은 세금을 공제하고 150만 원이 채 안 될 때였다. 결국 1년을 조금 못 채우고 그만뒀다.


고작 1년도 다니지 않고 포기한다는 말이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때 막연하게 갖고 있던 ‘디자인 에이전시’에 대한 선망은 잠시 접기로 했다. 당장 내 능력과 내 상황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에이전시에서 살아남을 깡은 부족했고 나는 매달 벌어야 할 돈이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기로 했다.


첫 직장 퇴사 이후 무언가 고민을 할 틈도 없이, 나는 당장 취업을 이어가야 했다. 여기저기 웬만해선 가리지 않고 여러 회사를 다녔다. 인쇄소에서부터 대기업 계약직, 주방용품 회사, 출판사 등 대부분 일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디자인 에이전시 디자이너가 아닌,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정적이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아

디자인 에이전시에 비하면, 일반 회사에 소속된 디자이너 생활은 제법 안정적이었다. 어느 정도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면 되는 디자인 일들이라 야근도 거의 없었다. 여전히 쥐꼬리만큼의 월급이지만 월급도 조금씩 오르기도 했다.


대신 일이 조금 지루한 편이었다. 매일 해야 하는 업무가 같거나, 매달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비슷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록 악바리처럼 버텨낼 용기가 없어 디자인 에이전시에선 벗어났지만 다양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시 에이전시를 도전해보기엔 이젠 내가 그들을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돈은 매달 벌어야 하겠고, 일의 즐거움도 느끼고 싶었던 나는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알음알음 통해 외주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욕구를 채워나갔다. 물론 부수익 창출의 힘도 컸다.


회사에 다니며 디자인 외주 일을 병행하는 일을 몇 년간 지속했다. 한 번 연락이 닿아 일을 하게 된 클라이언트에게서 두 번 세 번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혼자서 만드는 결과물에 뿌듯함이 생겼다. 그러다 월급 이상의 돈을 외주 아르바이트 수익만으로 벌기 시작할 즈음, 처음 ‘프리랜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는 사실 ‘안정적’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월급’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예 없으니까. 솔직히 매달 돈을 벌어야 하는 나에겐 맞지 않는 분야이다. 그런데 이런 나도 디자이너라고, 안정적이지만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뭐든 혼자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매달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앞에 쉽게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최소한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고정 수익을 확보할 일이 들어왔다. 바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계간 소식지 디자인 작업이다. 그 당시엔 1년으로 치면 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최소한의 무언가가 생겼다. 이 정도면 도전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완벽히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고민에서 전향하기까지 대략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전 12화 오늘의 디자인이 맞는 열쇠가 되길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