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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기 Jun 19. 2017

'알쓸신잡' 과연 알아두면 쓸데없는 지식은 존재하는가?

[명 강의의탄생#3] 알쓸신잡? 알쓸신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요즘 새로 시작한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물이나 현상을 두고 각자의 전문성으로 풀어내며 웃음을 유발하는 독특한 예능프로그램이다.


시청하다보면 “아..저게 저런 의미를 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기존의 패러다임이 와장창 깨지는 경험과 반성을 한다.  특히 '개와 늑대의 시간'의 뜻을 알고 나서는 예전 동명의 드라마가 이런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었구나..하며 나의 무지함을 탓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상에 스쳐가는 것들을 의미 있는 것들로 재탄생시킨 연출자의 기획력과 출연자의 지식에 존경을 보내며 나는 그렇게 애청자가 되어갔다.


#교육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문득 나도 내 삶에 스쳐가는 그 무엇에 나만의 의미부여를 해 보기로 했다. 내 일상이 그런지라 생각의 출발점은

‘오늘도 누군가는 강의를 하고 누군가는 그 강의를 듣겠지?’ 였다.


강의실에 책상을 가득 메우는 것은 교육 참여자이고

그 공간의 기운을 채우는 것은 강의하는 사람이다.

강의 종료 후 평가를 받는 것은 강사와 그 강사의 교육내용이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교육 참여자의 몫이다.

그럼 강의실에 주인공은 누구이며 과연 교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평가를 하는 사람인가 받는 사람인가?

물리적으로 인원수가 많은 집단인가?

아니면 전체를 주도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가?



#‘강의를 수강하는 사람’의 정의


‘강의실’에서 다수의 지분을 가진 ‘교육 참여자’를 '청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청중의 뜻을 알면 조금은 본질과 거리가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중(聽衆) : 음악이나 강연, 설교 등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


우리는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을 정의하기로 했으므로 두루뭉술한 ‘청중’이란 단어는 생략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단어가 적절할까?


흔히 대립관계에 두 단어를 구분하는 말로 ‘피(被)’라는 말을 붙여 쓴다. 교육을 받는 대상을 피 교육생이라고 칭하는 그것이 바로 그 '피'의 의미다.


*피교육자 (被敎育者) : ‘교육을 받는 사람’


이는 무언가를 ‘입다’는 의미의 '피'를 ‘교육자’라는 단어 앞에 가져다 놓아 교육자의 반대 의미를 만들었다.

흔히 어떤 '해'를 입은 사람을 '피해자'라고 하듯이 이 단어 자체는 굉장히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강의실에 억지로 나온 학습자야 말로 피해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이 '피교육자'라는 단어에 괜히 불만을 품어 보았다.(그냥 그랬다)

요즘 '누구든' 모바일 폰 하나로 '어떤 교육 콘텐츠'라도 손 안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시대인데 그저 주는 것을 받는 피 교육생이라는 의미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감이 든 것이다.


요즘처럼 배움이 목적지향으로 흘러가는 시대에는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배워가는 능동적 의미의 단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난 ‘학습자’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학습자(學習者) :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배워서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

(학습-習得-배워서 얻는다)


학습자는 교육시간에 배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공부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왜 때문이죠?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겠다 싶다.

‘당신은 왜 단어의 재 정의와 의미부여에 집착하고 있죠?’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위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교육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  

학습자인가? 피교육자인가?

그들은 교육을 받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는가?

그저 교육을 수용하는 존재인가?


교육에 있어 주체는 누구이며 그 주체를 이해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답을 하자면 학습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콘텐츠를 배워서 익혀가는 능동적 ‘주체’자이다.

이는 피 교육자나 청중과는 미묘하지만 아주 뚜렷한 차이를 둔다. 학습자에게 변화란 강사의 강의를 듣고 변화되는 ‘수동태’가 아니라 영감을 얻고 스스로 변화시켜 가는 ‘능동태’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체자는 교육을 통해 변화를 주도하는 학습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학습을 해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들에게 필요한, 또 그들이 원하는 교육 콘텐츠를 강의해야 한다.

단지 강의 내용을 특정 방법에 의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서 온전히 '주거나'(敎授-교수) 혹은

가르쳐서 '성장(육성)'시켜야 한다(敎育-교육).


그러기 위해 강사는 그들이 변화해 갈 수 있도록 필요한 교육 콘텐츠를 준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인지 분석하고 설계하는 과정을 선행해야 한다.


이런 개념들이 결국 다양한 교수설계의 밑거름이 된다.


강의를 그저 '만드는 것','짜는 것','개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본질적인 개념이 바로 이 단어들로 시작되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 알쓸신잡? 알쓸신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개인적으로 내용은 차치하고 프로그램 제목은 호기심 돋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 제목에 딴지를 걸어

‘알아두면 쓸데없는 지식이란 없다.’

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가는 ‘학습’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이든 배우고 익히든지 때가 되고 차오르면

각자 자신만의 경험으로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사족) 괜히 욕심이 생겼다. 이렇게 끝내기 아쉬우니 교육의 다른 단어들을 또 구분해보자! 라는..

그러다보면 만들어지겠지?  혹시 알겠는가?

알아두면 쓸데가 있는 신기한 단어사전!

이라도 나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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