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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책방알바 Oct 23. 2021

대성당

댕그랑, 책방 문이 열리자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안경을 쓰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

“어서 오세요.”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가 대답했다. 턱수염에 새치가 많았다.

“여기가 책방 맞지요?”

“맞습니다.”

“이 동네에 좋은 책방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그는 책방을 둘러보지 않았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맹인이었다. “선생님, 혹시 찾으시는 책이 있습니까?”

“내 이름은 로버트입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점자책은 없겠지요?”

“죄송해요. 점자책은 없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요, 요새는 오디오북이 잘 나오니까.” 그는 입술을 꾹 다문 뒤에 이어서 말했다. “컬러링북을 한 권 사려고요. 아, 내가 색칠할 건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남편에게 선물하려고요.”

“그러세요? 마침 새로 나온 컬러링북이 있습니다.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컬러링북인데 손님들이 아주 좋아해요. 이걸로 드릴까요?”

“좋아요. 그런데 책 속에 어떤 풍광들이 있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흠, 다리도 있고 바다도 있고...” 나는 책을 펼쳐 보이면서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잘 설명할 수 없었다. 로버트는 눈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 나는 마치 외국어로 설명하는 것처럼 답답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버트가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책을 두 권 살게요. 그리고 한 권에다 색칠을 해주세요. 대신 내가 선생님 손을 잡고 같이 칠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어떤 풍경인지 좀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그렇게 하시죠. 로버트, 내 이름은 초록이에요.”

“초록? 이름이 근사하네요.”

“고맙습니다.” 나는 책을 넘기면서 적당한 그림을 찾았다. “이 그림이 좋겠어요. 이 그림은 미륵도와 통영을 연결하는 다리인 충무교 그림이에요. 이 동네에서 다리까지 가는 길 내내 벚꽃나무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어요. 자, 그럼 하늘부터 색칠을 할게요.” 로버트는 내 손을 감쌌다. “여기가 하늘이고, 이건 다리고, 지금 그리는 건 나무들이에요.”

“아, 그렇군요. 내가 건너온 충무교가 이렇게 생겼군요. 그런데 초록, 하늘은 무슨 색으로 칠했어요?”

“하늘색이요.”

“다리는요?”

“음, 회색으로 칠했습니다.”

“나무는요?”

“물론 나무색이죠. 하하하.” 나는 뭔지 모를 어색함을 느끼면서 아까 긁적인 머리를 다시 긁적였다. 로버트는 그게 보이는지 내 머리를 힐끔 쳐다봤다.

“그렇군요. 이 다리는 어느 지점에서 보는 그림인가요? 반도 쪽인가요 섬 쪽인가요?”

“미륵도 다리 아래 동쪽 방향에서 보는 그림입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초록이 설명을 잘해서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하하하. 하나만 더 그려봐도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요. 그런데 로버트, 동생 대하듯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책을 훌훌 넘기면서 새로운 그림을 찾았다. “가만 있자, 이제 어떤 그림을 그려볼까요? 로버트 이건 어떨까요. 눈이 오는 그림이에요.”

“눈? 좋지. 내 수염에도 눈이 내렸거든.” 로버트는 즐거운 듯 싱글벙글 웃더니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로버트의 턱수염을 자세히 봤다. 검은 수염 사이로 하얀 새치가 무성했다. 아니 하얀 수염 사이에 검은 눈이 내린 걸까?

“내 수염이 좀 멋있긴 하지?” 로버트가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웃었다. “자, 초록. 하늘색, 나무색, 살색. 남들이 정해준 걸 다 믿지 마. 눈이라고 반드시 다 하얀 게 아니야. 어떤 마법사가 했던 말이 있어.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게 힘이라고. 넌 네 눈으로 사물을 볼 줄 알아야 해. 자, 이렇게 하자. 눈을 감아봐.”

“예?”

“자, 어서. 이 맹인 아저씨를 믿고 눈을 감아봐.”

나는 눈을 감았다.

“자, 이제 하늘을 쳐다봐. 자네가 가장 행복했던 하루의 하늘. 또는 자네가 가장 슬펐던 날의 하루. 자네가 새로운 의미를 찾았을 때의 하늘. 그때 내리는 눈을 그리는 거야. 어때, 눈이 무슨 색으로 보여?”

나는 하늘을 가만히 보았다. 고향을 떠나기 전 눈 내리는 바다 앞에 혼자 앉아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노란색이요.”

“오, 노란 눈이라. 그래, 아주 좋아.” 로버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 하늘에 또 뭐가 보여?”

“아주 멀리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눈 내리는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 좋아. 그럼 비행기를 그려야지. 컬러링북이라고 딱 있는 것만 그리란 법은 없잖아. 비행기가 보이면 비행기를 그려야지. 자, 자, 어서 그려봐. 그래, 그렇지.” 로버트는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처음 본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이제 나무는 어떤 색이야?”

나는 눈을 감고 노란 눈 사이로 보이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무는...보라색이요.”

“그래, 아주 좋아. 잘하고 있어, 초록. 보라색 나무들. 노란 눈이 쌓이는 보라색 나무들. 아주 좋아. 하하하. 마음에 들어. 자, 어서 보라색 나무들을 만들어봐.”

나는 나무에 보라색을 입혔다. 노란 눈이 쌓이는 보라색 나무들.

“자, 거기 서 있는 여자는 무슨 색 옷을 입었어?”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요.”

“그래? 춥겠는데. 그럼 몸은 무슨 색이야?”

“무지개색이에요.”

“와, 무지갯빛 여인이 보라색 나무들 사이에서 노란 눈을 맞으며 서 있어? 근사한 걸. 좋아. 자, 어서 그려. 그려봐.”

나는 무지개색으로 여자의 몸을 칠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자, 초록, 이제 다 그렸으니 그림을 찬찬히 봐봐.”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내가 상상한 그림을 바라봤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에서 노란 눈이 내린다. 노란 눈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내린다. 바람이 부는지 살짝살짝 흔들린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위에 노란 눈이 닿는다. 따뜻하다. 고개를 들어서 보라색 나무들 사이를 보니 무지갯빛 여인이 찬란하게 서 있다. 여인 옆에는 커다란 뿔이 달린 사슴이 서 있다. 여인과 사슴이 나를 바라본다. 웃는다. 여인도 웃고 사슴도 웃는다.

나는 무심코 탄식하듯 말했다. “와, 이거 대단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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