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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책방알바 Oct 23. 2021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 선생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더니 잠시 후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안 선생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초록님, 여기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맞는 걸까요? 내 비참한 운명은 다 내 성격 탓인가요?”

나는 안 선생의 손을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채 작가는 왜 날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많고 많은 캐릭터 중에 왜 날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안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야겠어요. 채 작가를 만나서 따져야겠어요.”

나는 다시 안 선생의 손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선생님 갈 때 가더라도 지금은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책방 옆집에 사는 복순이가 계속 짖기에 나는 밖을 힐끔 쳐다봤다. 구 선생은 안 선생의 개를 데리고 서서 뼈다귀를 든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꽁초를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고 말하려고 일어섰다가 안 선생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앉았다.

“채 작가는 그럴 분이 아니에요. 안 선생을 몰아붙이는 거 같아도 분명히 결정적인 순간에 안 선생이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줄 거예요.”

안 선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럴까요?”

“예, 그럼요.” 나는 안 선생에게 휴지를 건넸다.

“초록님 나 내일 떠나요.” 안 선생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나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구 선생을 봤다. 개 끈과 뼈다귀와 담배로 어설프게 저글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불안한 모습을 보면서 무심히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남편은 무슨 일을 하세요?”

“몰라요.”

“예? 결혼한 지 이 년이나 됐는데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요?”

“남편을 보면 그냥 하인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안 선생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선생님, 혹시 다른 기억은 나세요? 부모님이라든가, 어린 시절이라든가.”

안 선생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아니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안 선생의 눈빛이 반짝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정말 그래요. 그런 생각을 못했네요. 그런 질문을 한 것도 초록님이 처음이에요.”

안 선생은 밖으로 나가서 구 선생과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구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에잇, 저 사람이!” 나는 혀를 찼다.

두 사람은 서로 안았다. 구 선생은 뼈다귀를 들고 떠나고 안 선생은 개를 데리고 책방으로 돌아왔다. 복순이는 잠잠했다. 나는 안 선생의 개를 입구에 매어 놓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확실히 아는 건 결혼했다는 것과 개를 기른다는 것뿐이네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할아버지가 독일인이라는 것까지 아는데 나는 내 부모가 누군지는 모르죠.”

나는 팔짱을 끼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가 친구 하나 없이 자랐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결혼식조차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나는...” 안 선생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거군요.”

안 선생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제대로 살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안 선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남편이 하인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하인인지도 모를 일이죠.” 나는 무심코 말했다.

안 선생은 얼굴을 들어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내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서 코를 풀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하인 같은 게 아니라 하인이라니.”

“우리도 작가들처럼 현실의 비좁은 틈새에서 바늘 끝 같은 가능성을 찾아봐요.”

안 선생은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자 하인이었던 남편이 그 틈을 이용해 선생님의 남편으로 둔갑하고 선생님의 재산을 전부 차지한 것인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그럴지도...”

“선생님, 내일 집에 가시면 구석구석 한번 찬찬히 둘러보면서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잘 쓰는 베레모와 그...오페라 안경도 단서가 될지도 몰라요.”

“오페라 안경은 잃어버렸어요. 내 기억처럼.”

“선생님 괜찮아요. 단서는 또 찾으면 돼요.” 나는 안 선생에게 베레모를 받아서 안쪽을 봤다. 거기 모자를 만든 가게 이름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여기도 가보세요. 선생님의 부모님을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몰라요.”

나는 안 선생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 행복하게 사셔야죠. 이렇게 불행하게 사시니까 저런...”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선생님 희망을 가지고 진실을 알아냅시다. 설사 우리 생각이 틀렸다고 해도 선생님이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 선생님은 더 나은 삶을 바라시잖아요.”

“좋아요.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알아보겠어요. 기억을 꼭 찾겠어요. 정말 제대로 살고 싶어요. 나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선생님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누구도 아무것도 선생님을 막을 수 없어요.”

“초록님 상황이 바뀌면 다시 찾아올게요.”

“예, 꼭 오세요.”

안 선생은 밝은 표정으로 일어나 입구에서 개 끈을 풀었다.

“안나.” 내가 불렀다. 안 선생은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반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세요.” 안나는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개는 데리고 다녀도 저 유부남은 데리고 다니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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