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입고한 책을 펼쳐서 카운터에 팔꿈치를 대고 거북이 목을 하고 읽고 있는데 카운터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 전화가 왔나. 전화기 진동이 아니었다. 허리를 펴서 몸을 바로 세우고 카운터에 두 손을 댔다. 카운터는 계속 진동했다. 잠시 후 발밑에서도 뭔가를 느꼈다. 마치 책방 바로 밑으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급기야 서가에 세워둔 책들이 하나둘 넘어지고 벽에 걸린 액자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진이다! 몸을 피하려고 카운터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림책 서가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와 바닥에 쿵 떨어졌다. 나는 무릎을 다 펴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맙소사. 공룡이다.
“아이고, 허리야.”
나는 카운터 뒤로 몸을 숨겼다. 잠깐, 방금 공룡이 말을 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여보시오, 거기 카운터 뒤에 있는 선생.”
나는 카운터 너머로 눈을 빼꼼 냈다. “나 말인가요?”
“예예, 이리 와서 나 좀 일으켜 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공룡을 일으켜 세웠다. 키는 2미터쯤 되고 몸집은 모델처럼 호리호리했다.
“아이고, 또 미끄러졌네.”
“예?”
“그림책은 종이가 반들반들해서 중심 잡고 있기가 힘들어요. 조금만 균형을 잃으면 이렇게 미끄러져 떨어지기 십상이라니까. 동화책들은 왜 코팅지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공룡은 한동안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책방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혹시 물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아, 예.” 나는 컵에 물을 따라서 공룡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공룡은 마치 사람처럼 능숙하게 물을 마셨다.
“이런 적이 또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미끄러지긴 자주 미끄러지죠. 미끄러지면 옆에 있는 나무를 잡아서 지탱하기도 하고. 책이 꽉 닫혀 있으면 발을 헛디뎌도 떨어지진 않는데 책이 조금 열려 있는 경우에는 이렇게 밖으로 떨어지기도 하죠. 사실 오늘 같은 일은 드물어요.”
“그런데 그림책에서는 몸집이 작은데 나오면 왜 이렇게 커지는 거죠?”
“나도 모르겠어요. 차원이 바뀌어서 그런가. 실은 지금 멀미가 날 것 같아요.”
나는 공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손님이 안 그래도 없는데 있는 손님도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칠 것 같았다. 나는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다시 책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그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나온 책이 어디에 있죠?”
나는 그림책 서가에서 떨어진 책을 정리하면서 공룡 그림책을 찾았다.
“여기 있어요.” 나는 종이를 넘기면서 공룡이 떨어진 곳을 찾았다. “어?”
“왜 그래요?”
“책에 공룡 그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디에서 빠졌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건 아마도 책속 세상이 11차원이라서 그럴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그림책에는 그림이 여러 장 있지만 사실 그림책의 나는 하나뿐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공룡은 미간을 힘껏 모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 내가 홀로그램처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 이해하겠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물었다. “그러면 다시 책으로 어떻게 들어가요?”
공룡은 내가 펼쳐서 들고 있는 그림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피커에서 흐르던 음악 소리도 끊긴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책방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을 깬 것은 책방 문에 달린 풍경 소리였다. 댕그랑.
나는 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손님들이 들어왔다. 아빠와 엄마, 아이 둘. 나는 공룡을 쳐다보았다. 공룡은 어느새 책방 구석으로 가서 가만히 서 있었다.
“와, 공룡이다!” 아이들은 소리치면서 공룡에게 달려갔다.
“어서 오세요.” 나는 얼른 웃으면서 인사했다.
“와, 저건 뭐에요?”
“예, 공룡이에요.” 아이들은 공룡을 찌르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운 공룡 그림책이 나왔는데 공룡 그림이 하나도 없는 공룡 그림책이 나왔거든요. 그거 판촉용 공룡이에요.”
“와, 그런 책이 있나요.”
“예, 여기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나는 아이들이 매달려 있는 공룡이 걱정이 되어서 공룡의 표정을 살폈다. 공룡은 굳어버린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이들이 만져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처럼. 아이들은 공룡 그림이 없는 공룡 그림책을 사서 즐겁게 책방을 떠났다.
공룡과 나는 카운터에 앉아서 물을 홀짝였다.
“혹시 한국에 공룡 나라 같은 건 없겠죠?” 공룡이 물었다.
나는 공룡을 보면서 싱긋이 웃었다. “있긴 한데 거긴 가면 안 돼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방에는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았다. 공룡은 아무런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슬며시 요리책 서가에 가서 코팅지에 인쇄한 요리책들을 찾아서 책들을 조금씩 열어서 세워두었다. 그러고는 예술책 서가에 가서 코딩지에 인쇄한 미술책들을 들어서 종이들을 흔들어 종이 사이를 넓게 해서 다시 서가에 세워두었다. 슬쩍 공룡을 보니 공룡은 책들을 읽으면서 서가에 꽂았고, 공룡 그림책들을 조금씩 벌려 놓았다. 우리는 카운터로 돌아와 다시 나란히 앉았다.
“책 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글쎄요, 생각해보니 이렇게 독자와 실제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네요. 독자가 책을 펼치지 않는 한 우리도 서로 얘기를 하지만 독자들은 정해진 대사만 들으니까요. 책 안에서는 바깥에 있는 독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아까 아이들이 내 몸을 만질 때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공룡은 처음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네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공룡은 싱긋이 웃었다.
해가 지고 거리가 캄캄해질 때까지 우리는 카운터에 앉아서 책방을 떠나지 않았다. 책에서 음식과 그림과 공룡들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되도록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