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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책방알바 Oct 23. 2021

천일야화

앙투안 갈랑

“누나, 《대성당》 다 읽었어요?”

“다 읽었지.” 셰에라자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좋더라. 마지막에 그 남자가, 참 그 남자 이름이 뭐였지?”

“이름 안 나와요.”

“그래? 소설에 주인공 이름이 안 나오기도 하구나.”

“나 같은 무명인인 셈이죠.”

“아무튼 그 남자가 마지막에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는데 몸에서 전율이 쫙. 난 해방감을 느꼈어. 그 남자도 결국 자기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온 거잖아.”

“그렇죠. 의욕 없이 눈뜬장님으로 살다가 마침내 눈을 뜬 거죠. 눈을 감은 채로.”

“장님이 눈뜬장님의 눈을 뜨게 한다? 아, 좋다. 나도 남편한테 그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네.”

“걱정하지 마세요. 곧 그렇게 될 거에요. 나도 나도 한국의 성차별에 대해 눈뜬 봉사로 살다가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눈을 떴잖아요.”

“그래?”

“책을 덮을 땐 그냥 조용한 바닷가에 서 있는 것처럼 마음이 먹먹했는데 조금 있다 해일이 덮쳤죠.” 내가 말했다. “노예제 공부할 땐 미국의 노예주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출애굽기 설교를 듣고.”

“렛 마이 피플 고!” 셰에라자드가 신나게 외쳤다.

“집에 돌아가서는 노예들을 학대하는 모습이 정말 이상했어요. 나는 해방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좋은 노예주였던 거죠. 물고기가 바다에서 물기를 털어내려고 몸부림을 친 거죠. 우리는 전부 물 밖으로 나가야 해요.”

“내 나라도 변할 수 있을까?”

“천일이 지나고 하루가 더 걸리더라도 꼭 그렇게 될 거에요. 누나 이야기에는 힘이 있으니까.”

셰에라자드는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넌 좋겠다. 왕이 없는 시대에 살아서.”

“민주주의가 좋긴 한데 대의민주주의는 좀 후져요.”

“왜?”

“왕은 없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세속 귀족 계급제가 선출 귀족 계급제로 바뀐 것뿐이거든요. 왕국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죠. 사람들은 아직도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한다니까요. 이런 상황이 나아지려면 시민들이 입법권을 찾아와야 해요.”

“와, 우리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시민들이 직접 법을 만들 수 있다면 정말 근사하겠다. 사회 변화가 빠르겠는걸.”

“시민들이 진짜 주인이 되는 거죠.”

나는 서가로 가서 《시민 쿠데타》를 뽑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 책에 보면 스위스 국민들은 1848년부터 최소 10만 명의 지지를 받으면 시민 발의 국민 투표를 실시해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고 해요. 여태 시민이 주도한 국민투표가 무려 200차례 이상 이루어졌고 그중 10퍼센트가 법률로 채택됐대요. 대단하지 않아요?”

“이리 줘봐.” 셰에라자드는 책을 뺏다시피 하다가 실수로 카운터에 올려둔 램프를 툭 건드렸다. 램프는 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진 램프에서 지니가 나오면서 무릎을 싹싹 문질렀다. “아, 미안. 잘못해서 떨어진 거야. 다시 들어가.” 지니는 중얼거리면서 램프로 들어갔다. 나는 램프로 들어가는 지니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국 국회의원들은 게으르기로 유명하거든요. 한국이 발전하려면 시민들에게 입법권이 있어야 해요. 총선이 사 년마다 있는데 국회에만 입법권을 맡겨놓으면 사 년, 팔 년, 십이 년 한국 사회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맴돌 거예요.”

“술탄은 짐이 곧 법이라고 말할걸.”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램프 안에서 지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누나는 가야겠다.” 셰에라자드는 램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또 남편한테 이야기를 해줘야지. 또 올게, 안녕.”

“누나,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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