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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책방알바 Oct 23. 2021

꽃신

김용익

나는 세병관을 지나 토성고개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출발을 앞두고 분리수거를 시작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왜 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려고 했는데 늦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형은 기다란 벤치 옆에 서서 선생의 생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허리 옆으로 차들이 지나갔지만 형은 선생의 문장처럼 반듯했다. 장터에서 꽃신 장인을 만난 순간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이 겹쳤다.

“상도 형. 일찍 왔네. 먼저 들어가지 왜 밖에 있어?”

“왔어?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렸어.”

“들어가자.” 나는 형의 어깨를 밀었다.

마당에는 가을이 들었고 우리는 새소리를 들었다. 하늘은 높고 지붕은 낮았다. 형은 선생의 손을 잡고 걷는 것처럼 손을 꼭 쥐었다. 형의 발걸음은 오랫동안 떠나 있던 아버지의 집을 찾는 아들의 발걸음 같았다. 우리는 선생의 생가로 들어갔다.

“김용익 선생님이 1969년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거 알아?”

“정말이야? 전혀 몰랐어. 아니 어떻게 그걸 아무도 말하지 않지?”

“선생님 덕분에 영문학은 더 이상 서양의 것이 아니라 마침내 한국의 일부가 됐는데도 한국에서는 김용익 선생님보다 영어 문제 잘 푸는 강사들이 더 유명해.”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통영에 와서야 김용익 선생을 알게 됐다. 그동안 영작문 책을 수없이 읽었지만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소설가가 모국어 대신 영어로 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올랐으니 당신도 영어로 글을 쓸 수 있다는 문장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형이 말했다.

“형, 그런데 화혜장 밑에 들어갔다는 말이 사실이야?”

“그래, 소 잡던 손으로 꽃신을 만들려니 정말 어렵더라.” 그는 멋쩍게 웃었다.

“가게는?”

“삼촌에게 넘겼어.”

“대체 뭐가 좋아서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꽃신 장인이 되셨을까?”

형은 가만히 창밖을 쳐다봤다. “나가자.”

우리는 마당으로 나가서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가을바람에 흔들린 나무는 얼굴을 붉히고 우듬지에 앉은 새들은 흔들리는 몸으로 서로 사랑을 노래하느라 바빴다.

“돈을 버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잘사는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진실하지 못하면 다 헛일 같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선생님도 그랬을 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거야. 선생님은 누구보다 진실하게 살려고 미국에 가서 영어로 소설을 썼을 거야.”

진실한 삶. 나는 그 말이 멋지게 들렸다.

“형은 왜 여자친구랑 도망가지 않았어? 나 같으면 같이 도망가서 결혼해서 살겠다. 그게 진실한 삶이지. 형 말해봐. 사실 여자친구한테 차인 거지?”

“난 어쩌면 여자친구를 사랑한 게 아니라 아저씨의 꽃신을 사랑했던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무슨 말인지 가늠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내가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여자친구를 사랑했으면 아저씨가 반대했을 때 네 말대로 둘이 도망칠 궁리를 했겠지. 그런데 나는 칼을 들고 아저씨를 죽이려고 했거든.”

“둘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었네. 햄릿처럼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죽이면 결혼도 못하는 거 아냐?”

“그랬겠지.” 형은 풀을 하나 뽑아서 풀피리를 불었다. “나는 그때 알았어. 여자친구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부산으로 떠난 거야.”

“부산에선 아저씨를 어떻게 만난 거야?”

“장터에 갔다가 만났어.”

“아저씨가 대번에 알아보지 않았어?”

“아니.” 형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도 못 알아보시더라.”

“며칠 망설였다가 인사하려고 마음먹고 찾아갔을 땐 아줌마가 나와 계셨어. 아저씨는 하루 전날 돌아가셨다고 하시더라. 내가 정말...” 형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형은 왜 화혜장이 되고 싶은 거야?”

“그야 꽃신을 만들고 싶어서지.” 형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게 다야?”

형은 눈물이 번진 얼굴로 나를 한번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형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왜 꽃신 장인이 되고 싶은지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응, 궁금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나는 기억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진실한 삶은 결코 침몰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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