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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책방알바 Oct 23. 2021

햄릿을 수사한다

피에르 바야르

“이걸로 주세요. 이거 학교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나는 이걸로 주세요.”

덴마크에서 왔다는 손님 둘은 카운터에 와서 《푸른 씨앗》과 《꽃신》을 내밀었다.

“김용익 선생님의 글을 학교에서 읽으셨다니 내가 다 뿌듯합니다. 참, 통영에 김용익 선생님 생가가 있어요. 거기에 가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두 사람은 가지 않고 카운터 앞에 계속 서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두어 번 깜빡였다.

“사실 우리는 덴마크중앙정보국 요원들입니다.” 꽃신이 말했다.

“예?”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등산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미심쩍게 물었다. “그런데요?”

“우리는 햄릿 왕의 살인범을 쫓는 중입니다.”

“범인은 클로디어스가 아닌가요?”

“햄릿 왕이 죽던 날 오후에 어디에서 뭘 하셨습니까?” 꽃신보다 키가 작은 푸씨가 끼어들었다.

“여기는 신참이라서” 꽃신은 푸씨를 보면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푸씨는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의욕이 넘칩니다. 양해해주세요. 요즘 책방에서 북클럽을 하고 있죠?”

“예, 저녁에 모여서 책 이야기를 하죠.” 나는 다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아서 천장을 올려보며 말했다. “캄캄한 동네에 책방에서 불빛이 흘러나와서 이웃에 스미는 모습이 참 좋아요.”

“지난번에 읽은 책이 무엇입니까?”

“햄릿이요.” 나는 무심코 말하고는 거스름돈이 없는 상황에서 오만 원을 받았을 때처럼 몸이 굳었다. “아니, 우리가 햄릿을 읽은 걸 알고 오신 겁니까?”

“그것까진 아실 필요가 없고요.” 푸씨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눈동자가 푸른 씨앗 같았다. “혹시 햄릿 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지목한 회원은 없습니까?”

“가만 있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모두 클로디어스라고 했고요 한 사람만 햄릿 왕자라고 했어요.”

“무슨 근거로 그러든가요?”

“햄릿이 환각에 빠져서 연쇄살인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흠.” 푸른 씨앗은 수첩에 뭔가를 썼다. “하지만 극중극이 끝나고 클로디어스 왕이 혼자 기도하면서 죄를 실토했잖습니까?”

“나도 그 대목이 석연찮긴 합니다. 만약 햄릿이 범인이라면 아버지뿐 아니라 작은아버지, 연인의 아버지와 오빠, 두 죽마고우까지 죽였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햄릿 왕자는 하루라도 빨리 왕이 되고 싶어서 선왕을 죽였다는 것인가?” 꽃신이 말했다. “대관식이 열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결혼식이 열리는 바람에 오히려 양자로 전락한 셈이로군.”

“이제 클로디어스가 아들이라도 낳으면 햄릿 왕자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죠.”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클로디어스까지 죽이지 않으면 안 됐던 거죠.”

“햄릿 왕자가 아니라 폴로니우스가 선왕을 죽인 게 아닐까요?” 푸씨가 꽃신을 옆으로 데리고 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분명히 배후에 왕비가 있습니다. 왕비가 결혼의 대가로 남편을 죽이라고 클로디어스를 부추겼고, 클로디어스가 폴로니우스에게 시킨 짓입니다.”

“쉿.” 꽃신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푸씨에게 말했다. 푸씨는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꽃신의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꽃신은 나에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한숨을 쉬면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때 댕그랑, 책방 문이 열리고 캐롤라인이 들어왔다.

“캐롤라인, 지금은 안 돼요.” 나는 들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펼쳐서 캐롤라인을 향해 흔들었다.

캐롤라인은 입구에 선 채 우리를 보고는 싱긋이 웃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누굽니까?”

“아, 있습니다. 책방에만 오면 책들을 꺼내서 던지는 손님이에요.”

“그런 손님이 오면 힘들겠어요.”

“예, 완전한 행복의 나락이지요.”

푸씨는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설마 캐롤라인 이름을 적는 건 아니겠지. 이제 캐롤라인도 덴마크 정보국의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행운을 빌어요, 캐롤라인.

“흠흠.” 수첩에 뭔가를 적던 푸씨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세간에는 햄릿 왕이 가족은 돌보지 않고 전쟁에 열중한 탓에 왕비가 클로디어스와 바람을 피웠고 햄릿을 낳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햄릿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었군요.”

꽃신이 푸씨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푸씨가 나에게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우리가 북클럽 모임에 참관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내일 저녁입니다. 학창 시절에 김용익 선생님의 글을 읽었던 소감을 말씀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통영에서 하루 주무시고 참석하면 되겠네요. 주무실 데는 있나요?”

“아니요. 찾아보겠습니다.”

“괜찮다면 책방 다락방에서 주무세요.”

“감사합니다.”

“따라오시죠.”

두 요원은 다락방에 짐을 풀고 책방 마당에 앉아서 김용익 선생의 책을 읽었다. 김용익 선생의 생가에는 내일 가겠다고 했다. 푸른 씨앗 같은 눈동자는 푸른 마당에 앉아서 김용익 선생의 책을 탐독했다.

한국 전쟁을 피해 부산에 모인 피난민들이 가득한 장터. 꽃신 장인 옆에 앉아 있던 점쟁이도 알 수 없었던 한국의 미래. 그 미래를 향해 김용익 선생은 총알 대신 잉크로 아주 작은 푸른 물결을 일으켰다. 그 물결은 케이 문학이라는 커다란 파도로 일어나 세상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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