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파리 안식년의 전과 후로 나뉜다.
파리를 경험하고 다른 사람이나 삶으로 변했다기보다 파리의 삶을 계기로 세상과 나를 향한 질문이 더 깊어지고 집요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 분야가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이 대중매체를 통해 부각되고 유명해지고 난 후에야 마음을 공부하고 이해하며 돌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을 뿐이다. (그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잘 이행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내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음은 경시됐다.
드러난 모든 감정은 뿌리째 짓밟히거나 축소돼 별거 아닌 양 치부되는 정서적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 문화 속에서 자랐다. 집에서는 말대꾸했다고 맞고, 학교에서는 떠든다고 맞았다. 나의 감정은 쉽사리 무시됐지만, 권력자의 감정에 조금이나마 생채기만 나도 폭력은 정당화됐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내 감정은 죽이고 타인의 감정은 상처 내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의식은 점점 높아지고 늘 나보다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살았으니, 나의 마음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한 건 당연한 이치다.
파리지앵들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는 거 같았다. 일상에서 삶을 즐기는 걸 당연시한다. 무엇을 하든, 뭐가 됐든 내가 행복하고 기뻐야 하니까. 남을 의식하지 않고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래서 파리지앵들은 ‘쾌락’을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눈의 즐거움, 입의 만족을 갈망하는 파리지앵들을 보며 패션과 음식 산업을 전 세계적으로 선도할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쾌락을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쾌락의 사전적 의미는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이다. 여태 나는 쾌락을 왜 부정적으로만 인식했을까. 감성이 만족한다는 느낌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대다수의 파리지앵에게는 ‘일’, ‘노동’의 목적 또한 노후에 연금을 받아 인생을 즐기기 위함이다. 주말엔 밀린 업무 따윈 잊고 쉬고 놀아야 하며 여름휴가 역시 기본 4주 이상은 보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문화는 고스란히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프랑스에서 제일 좋았던 점을 꼽으라고 하면 점심시간과 방학을 이야기한다. 쉬는 시간은 30분이고, 점심시간은 2시간이나 된다. 학기 중 6주에 한 번씩 2주를 쉬면서도 여름방학은 2달이나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의 감정이 존중받는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에 와서야 비로소 나의 감정과 욕구에 반응하고 충실하게 사는 게 뭔지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가 한몫했고 가족 모두가 새로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적응하려 애쓰다 보니 갖가지 감정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나도 평생 감정을 억제하고만 살았으니 격정적인 마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없었다. 감정 앞에 나 자신에게도 나의 아이들에게도 서툴고 야박했다. 슬플 때는 힘을 내라고 무작정 다독였고, 화날 때는 참으라고 거칠게 토닥였다. 어떤 감정이든 먼저 조절하고 참는 법부터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슬플 때는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슬픔을 온전히 느끼며 다 쏟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
화날 때는 참지 말고 마음껏 화내고 욕하고 피아노를 쿵쾅쿵쾅 치도록 분이 풀릴 때까지 놔둔다. 감정을 끝까지 알아줄 때 회복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아이들을 통해 프랑스에서 알게 됐다.
나에게도 그 방법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진짜 잘 안된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피하고 꺾는 법만 알았지, 감정과 독대하는 법은 잘 모르기에)
그럼에도 감정을 무턱대고 덮어두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편하다. 더 나아가 지금은 그 감정이 그 당시의 감정을 넘어서 그 이상을 기대하며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건 수용받고 알아주기를 원하는 어느 시절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신호다. 아직 그 신호에 응답할 수 있는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했지만,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다. 이것이 진정 나를 더 알아갈 기회니까.
눌러놨던 감정을 깨우는 데 명상이 많은 도움이 됐다. 한번은 생전 처음 느낀 감정으로 전율한 적이 있다.
명상 앱을 틀어놓고 호흡에 집중하는데 나를 위해 그 순간에도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온전히
내 영혼에 전달됐다.
‘언제나 내 심장은 나를 살리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었구나.’ 평생을 무기력하게 살았던 내가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만끽한 순간이었다.
또 언제는 명상 중에 나를 붙들고 있던 어떤 끈이 놔지는 순간이 있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통제 불가한 흐느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심연에서부터 솟구쳤고, 나는 어느새 목 놓아 통곡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질 않고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주체성과 힘을 뺏긴 채 숨은 쉬고 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았던 나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런데 우주였는지, 신이었는지 정체 모를 큰 존재가 나를 온전히 감싸고 안아주며 위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존재가 어쩌면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겠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 유일무이한 소중한 나 자신과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