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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꺄나발(carnaval)

꺄나발(carnaval)

그게 인생이지 C’est la vie



프랑스 학교에는 꺄나발(carnaval)이라는 행사가 있다. 꺄나발은 아이들이 어떤 특정한 캐릭터로 변장하는 일종의 costume party다. 학교마다 자체적으로 꺄나발을 진행하므로 꺄나발을 여는 목적이나 주제는 제각각이다. 첫째 아이의 학교에서는 조만간 수학여행을 떠나는 1학년 학생들을 위한 모금 행사로써 꺄나발이 열렸고, 둘째 아이의 학교는 단순히 봄을 맞이하는 축제로써 꺄나발이 개최되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요즘 파리의 학교에서는 꺄나발이 한창이다. 이 흐름에 따라 장난감 가게에서도 갖가지의 코스튬이 세일 중이다. 허나 2개를 사야지 그중 하나만 겨우 반값 할인을 받는 얄궂은 마케팅 전략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 코스튬을 두 벌씩이나 사야 하나 고민에 빠졌더랬다. 


그러던 중 파리의 한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중세 시대 기사 코스튬을 득템하는 행운을 건졌다.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벼룩시장에는 역시 짜릿한 희열이 있다. 딱 필요했던 물건을 십분의 일 가격으로 얻는 횡재라니. 뭐든 빠르게 결정하는 나와 달리 사소한 결정에도 재고 또 재며 시간을 지체하는 짝지의 느릿한 성격이 이럴 땐 왜 이리도 고마운지. 그때 내 뜻대로 세일하던 코스튬을 샀더라면 지금쯤 후회로 가득한 배앓이를 했을 테다. 


둘째 아이의 학교는 아이들이 마음껏 상상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라고 테마를 지정하지 않았지만, 첫째 아이의 학교에서는 중세 시대라는 테마가 이미 정해져 있던 참이었다. 두 학교의 꺄나발 일정이 달라 번갈아 가며 입으면 되고 칼과 방패 세트는 2개나 되니 이것이야말로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둘째 아이는 학교에 코스튬을 입고 등교해야 했다. 아이는 중세 시대 기사로 변신한 자신의 늠름한 모습이 만족스러운 지 몇 번을 거울로 확인한 후 뾰족한 칼은 집에 놔두고 방패만 들고 집을 나섰다. 등굣길서부터 평소와 다른 자기 모습을 의기양양 뽐내며 걷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들떠있는 표정에도 둘째 아이 못지않은 흥분감이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학교에 들어가니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는 체격 좋은 40대 후반의 흑인 여자 보안 선생님과 언제나 도도하여 영국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전형적인 사감의 포스를 풍기던 금발 쇼트커트의 호리호리한 50대 초반 교장 선생님이 슈트가 아닌 붉은색 기모노를 입고 활짝 웃으며 둘째 아이를 맞아주었다. 이 두 선생님은 아이를 향해 “정말 멋진 기사구나!”라고 연신 감탄을 쏟아내며 아이의 흥을 돋우어 주었다. 아이의 반에 들어가니 담임선생님도 연분홍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한복의 인지도는 역시 떨어지는구나 실감하며 담임선생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특유의 오버액션으로 엄지를 치켜올리고는 아이의 코스튬을 칭찬했다. 그러고선 ‘기사’는 프랑스어로 ‘chevalier’이며, ‘말’이 프랑스어로 ‘cheval’이기 때문에 기사라는 단어는 말을 타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설명을 말을 타는 우스꽝스러운 시늉과 함께 해주었다. 아, 어찌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나도 정말 재밌게 불어 공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니 둘째 아이가 은근히 부러웠다. 아이의 남자 친구들은 헐크, 배트맨, 수퍼맨, 해리포터, 피터팬, 곰 등으로 변하였고, 여자 친구들은 마녀, 공주, 헤르미온느, 레이디버그, 토끼 등으로 변장했다. 기사로 변장한 두 명의 친구가 아이를 보자마자 다가와 동질감을 표현하며 좋아했다. 이렇게 아이는 코스튬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색다른 경험을 하며 프랑스 학교에서의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에서는 저녁 7시 반부터 행사가 시작됐다. 학부모들이 만들어 온 케이크, 쿠키, 파스타, 피자, 팝콘, 젤리 등 다양한 음식과 음료가 준비돼 있었고, 학부모들을 위한 맥주와 와인 같은 주류만이 유일한 판매 대상이었다. 학교 입구에 모금함이 놓여있어 자발적인 후원이 가능했다. 

첫째 아이는 4월 셋째 주에 3박 4일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지방의 한 성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이 학교의 전통이자 자랑이다. 선생님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여행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한다. 물론 이 모든 세부적인 사항은 학부모들과 세 번에 걸친 회의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었다. 며칠 전에도 여행의 마무리 준비 단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질문하는 학부모 회의가 있었다. 


이 수학여행에는 한 학생당 총 230유로의 경비를 내야 하는데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분할 지급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형편이 안 돼 완납을 못 하는 학생들이 있어 모자란 자금을 메꾸기 위해 꺄나발이 기획된 것이다. 학교는 전교생과 그들의 가족이 이 모금 행사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1학년 학생들의 독립심을 기르기 위한 수학여행을 지원하는 의미 있는 행사에 많은 학부모와 선배 학생들이 동참하였다. 꺄나발 행사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교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중세 시대의 어떤 캐릭터로 변장한 건지 묻기도 하고, 기사로 변장한 두 선생님이 결투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손을 잡고 운동장을 행진하기도 하고, 어떤 음악이 나오니 여러 학생과 선생님이 플래시몹처럼 단체로 깜찍한 안무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실내 체육관 한쪽에서는 1학년 아이들이 가게 될 수학여행 장소의 사진과 관련 정보가 PPT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안무를 즐겁게 따라 하며 파티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첫째 아이는 달빛 아래 기사로 변장한 친구들과 칼싸움 놀이를 하며 지칠 줄 모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아이가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져 친구들과 생활하게 될 수학여행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안전할까 걱정이 되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이 여행에 보냈던 선배 학부모들이 그것의 유익을 알고 모든 1학년 학생이 수학여행에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지원하는 모습을 보며 위로받았다. 그래도 불어가 서툰 첫째 아이가 수학여행에 가서 괜찮을지 걱정하며 이야기하는 내게 한 프랑스인 아빠는 파리지앵다운 시크한 바이브를 풍기며 다소 태연한 표정으로 위로를 건넸다. 

“3박 4일은 금방 가요. 아이에게 좋을 거예요. 그게 인생이지요(C’est la vie)!” 


아이를 뱃속에 가진 순간부터 아이의 안위와 행복에 대한 걱정은 숨쉬기하듯 일상을 채운다. 아마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걱정과 무관하게 아이는 무수한 도전과 실패와 아픔과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삶이니까. 어쩌면 성공하고 기쁘고 행복한 나날보다 고통의 순간들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그럴 때마다 부모인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지극히 제한적이다. 우리는 아이가 자신만의 어려움을 몸소 겪으며 더 성숙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다듬어져 가기를 기도하며 옆에 함께 있어 줄 뿐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책임져 줄 수도 없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굳세게 먹는다. 이렇게 낯선 환경에서도 적응해 낸 아인데 수학여행 가서 홀로서기 또한 잘할 거라고 우리 부부는 서로를 다독인다. 그게 인생이라고. (참고로 태연하게 “C’est la vie”라고 위로를 건넸던 파리지앵 아빠는 수학여행 당일 아이를 버스에 태우고는 가장 많이 울었다.)


파티를 뒤로하고 나와 은은한 꽃향기가 그윽한 선선하고 감미로운 봄의 밤공기를 만끽하며 넷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가야 할 인생길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랬듯 그 길에는 분명 홀로 외롭게 견뎌내야 할 아픔이 있을 거라는 건 안다. 그때를 위해 지금 더 안아주고 밀도 높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너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도록 무한한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 주는 것. 부모인 우리는 그거밖에 할 게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새 수학여행에 대한 걱정은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서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밤에 밖에 있으니 좋다며 좀 더 걷다가 집에 들어가자는 첫째 아이의 손을 나도 덩달아 꽉 붙잡고 함께 걸었다. 이 순간이 금세 날아갈세라 아이들의 표정과 말 하나하나와 파리 밤의 풍경을 꾹꾹 가슴에 새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언젠가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을 하루가 이렇게 또 흘러간다.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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