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한국에 있을 때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큰아이가 4살, 작은아이가 2살 무렵 외할머니댁에 잠깐 홈스테이하던 미국인 선교사를 다섯 번 정도 만난 게 전부다. 그마저도 너무 어렸을 때이기도 하고 단발적인 만남이라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놀기까지 했지만, 아이들의 뇌리에 남지는 않았다. 나들이나 여행 중에 분명 스쳐 가며 본 외국인들이야 많았겠지만 관계가 없으니, 외국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나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에 오니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매일 보고, 학교에 다니며 외국인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한국말만 하는 한국 사람들 속에만 있다 다양한 모습의 외국인들과 프랑스 말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아이들은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170cm의 큰 키, 금발의 단발머리, 쌍꺼풀이 짙은 헤이즐넛 색의 푹 꺼진 큰 눈, 그리고 그 눈 위아래로 검은색 아이라인을 선명하게 그린 50대 초반쯤의 담임선생님을 둘째 아이는 특히 무서워했다. 처음 보는 낯선 외모를 가진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까지 계속해 대니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같은 반에 있는 자기보다 몸집이 큰 곱슬머리 흑인 여자아이를 무서워했다. 지금이야 그 여자아이가 귀엽다고 하지만 처음엔 옆에 앉는 거조차 꺼렸다.
그러다 보니 둘째 아이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다가가지도 않았고, 친구들이 다가오면 도망가 버렸다. 온종일 무표정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수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런 아이에게 선생님은 다가가고 싶어 했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선생님에게 그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고, 필요를 알리지 않는 아이가 걱정되었다. 아이의 반에는 27명의 친구가 있다. 담임선생님 한 명과 두 명의 보조 선생님이 함께 아이들을 돌본다. 아침마다 아이를 데려다주는 모든 엄마나 아빠와 일일이 인사를 하며 필요한 얘기를 주고받는다. 그래서 아침 등교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항상 정신없고 바쁘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선생님은 나를 붙들고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일 먼저 가르쳐 달라고 하는 문장이 바로 “기분이 어때?”였다.
종일 웃음기 하나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아이가 기쁜지, 슬픈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저 문장을 여러 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선생님은 들리는 대로 따라 말하며 프랑스 알파벳으로 저 문장의 소리를 받아 적었다. 교실로 막 들어오는 다른 학부모들에게 인사 대신 지금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며 미안하단 멘트를 급하게 날리고선,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둘째 아이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한국말을 이상하게 하는 선생님이 우스꽝스럽게 보인 것이다. 한국말을 자기보다 못하는 선생님을 보며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큰 어른도 한국어를 못하는데, 아직 아이인 자기가 프랑스어를 못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매일 학교 가기 전에 그렇게 세뇌하듯 너는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못 하는 건 당연하다며 아이에게 뇌까린 말이 선생님의 노력을 통해 이제야 전달이 되었다.
선생님은 지금도 간헐적으로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가자!”, “점심 먹자!”, “운동장 가자!”,
“친구 누구야?”, “선생님 말 따라 해 봐!”, “괜찮아?”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와 프랑스어로 말을 건 날엔 무척 기뻐하며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친구들과 함께 꾸미며 웃고 즐거워하는 아이를 대견해하였다. 아이의 행복한 감정이 보이니 선생님도 안심이 된 것이다.
첫째 아이도 여러 번 고비가 있었던 2주간의 적응 기간이 지난 후, 담임선생님이 아이와 함께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학교생활하는 기분이 어떤지 아이에게 물어봐 주실래요?”
학교를 이제 좀 적응해 가는 거 같지만 아이와 소통이 안 되니 아이가 과연 행복한지, 혹시 아직도 무섭고 힘든지 선생님은 염려스러웠다. 구글 번역기를 통해 여러 번 아이의 기분을 물어보려 했지만, 번역이 엉망이라 그런지 아이가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거 같다고 했다. 아이의 상태와 감정을 아는 것이 선생님 자신에게 중요하기에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질문하며 선생님에게 아이의 솔직한 감정을 통역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을 아직 힘겨워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었다. 두 담임선생님 모두 아이들의 감정에 그토록 관심을 쏟는 게 고맙고 신기했다.
나는 초등학교만 다섯 군데를 다녔다. 아빠 사업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씩 이사와 전학을 다녀야 했다. 어떨 때는 사업이 번창하여 사업장을 확장하기 위해서였고, 어떨 때는 부도가 나서 단칸방으로 살림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성실히 학교 수업에 임하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학기 중간에 전학을 가다 보니 친구 관계가 늘 어려웠다. 그 과정 중에 내 감정을 묻거나 내 기분에 관심 있는 선생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밉보이지 않기 위하여 궁핍한 형편에 촌지를 돌리는 엄마를 보고 그때야 형식적으로 짝꿍을 붙여줄 뿐 힘들어하는 한 학생의 감정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이상한 선생님들만 만난 건지, 우리 아이들이 운 좋게 프랑스에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맡겨진 아이 중 제일 힘겨워하는 그 한 이방인 아이의 감정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선생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정신건강의학과 정혜신 박사도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 감정은 자기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사실상 아이들이 프랑스 학교에 다니며 힘들어할 때 우리가 부모로서 가장 신경 써서 해줬던 게 그 부분이었다. 아이들이 쏟아내는 모든 감정을 충분히 표출하고, 미세한 감정의 찌꺼기까지 밖으로 꺼낼 수 있는 환경 안에서 공감해 주려고 노력했다. (앎과 실력의 간극으로, 인내심의 부족으로 떼쓰고 화내는 아이 앞에 내 감정이 앞서 아이의 감정을 완전히 알아주는 데 실패할 때도 물론 있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할 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어떠한 감정을 느낄 때 오버하지 말라고 절제시키거나, 나약하다고 채찍질하며 감정을 등한시하고 눌러두려 할 때가 많다. 사실 수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정을 충분히 공감받거나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그러니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끄집어내는 것도, 다른 이의 감정에 관심 두고 공감하는 것도 서툴 때가 허다하다. 나의 선생님들도 어쩌면 자신들조차 감정을 누르며 살았기 때문에 전학 온 아이가 알아서 살아남기를 방임하며 지켜보는 것이 참 교육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 하나하나를 그 자체 그대로 옳다고 인정받을 때, 그래서 그것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마음의 치유가 있고, 삶의 전진이 있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아진다. 정혜신 선생님에 따르면 심지어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살릴 힘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감정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잘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아이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선생님들이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