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May 08. 2018

출근 두 달 차의 다섯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그 애매함이 결국 나를 여기 남게 만들었다

1. 시간 참 빠르다. 스톡홀름의 디자인 회사 Above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한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작은 프로젝트 두 개는 마무리, 하나는 진행 중, 두 개는 막 시작하려는 참이다. 마침내 사람들 이름도 다 외웠고, 인사도 어색하지 않게 건네고, 커피 한 잔 같이 마실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더 중요한 건, 누가 무엇을 하고,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머나먼 스웨덴에도 내가 있을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2. 최근 산업 디자이너, 엔지니어와 함께 기존 제품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업데이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엔지니어는 PCB 기판을 짜고, 산업 디자이너는 3D 프린터로 목업을 만들고, 나는 아두이노로 인터랙션을 디자인하면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클라이언트 미팅에 들고 가서 보여줬더니 다들 신기한 눈으로 이거 저거 눌러보더니 별다른 이견 없이 마무리되었다. 제품 출시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는 없으나, 실제에 가까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걸 눈으로 보고 있으니 설레는 기분을 이루 말할 수 없다.


3. 한국에서와 달리 스웨덴에서는 능동적으로 일한다. 일이 없으면 누가 주거나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자연스럽게 참여해서 일해보지 않았던 사람과 일하고 내 업무 범위를 넓힐 기회가 생긴다. 


방법은 꽤 간단하다. 월요일 아침마다 이번 주에 각자 어떤 일을 하는지 공유하는 자리가 있다. 여기에서 나에게 시간 여유가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이야기하는 방법이 있다. 그다음은 메일이나 슬랙에 올리는 방법. 처음에는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마지막은 매니저와 이야기하는 방법. 지금까지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얼마 전 휴가와 출장 때문에 두 달 중 3주도 채 못 만난 멘토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능동적으로 일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좋다며 본인이 의도한 대로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멘토가 너무 안 챙겨준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바쁜 와중에도 신경 써주는 게 고마워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4. 매니저와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중간 점검 미팅을 했다. 매니저는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고, 나는 내가 그동안 했던 프로젝트와 구체적인 역할, 그리고 멘토, 다른 디자이너에게 받은 피드백을 덧붙여 대답했다. 그는 만족스러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일하면서 아쉽거나 더 해보고 싶은 일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최근 내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어떤 장점을 갖고 있는지, 이 회사에서 내가 잘하는 리서치나 브랜딩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 할지, 아니 디자이너가 될 수는 있는지, 그러려면 어느 분야를 더 파고들어야 할지, 그게 프런트엔드 개발인지, 산업 디자인인지 등. 그는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더니 마커를 들고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그는 내 장점이 리서치해서 만든 전략을 바탕으로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서 테스트하고, 다시 전략 단계로 올라와서 수정하고, 다시 프로토타입과 만들고, UI 디자이너와 인터랙션과 디자인을 마무리해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개발자에게 넘겨줄 수 있는, 다시 말해 서비스 디자인부터 UX 디자인, 인터랙션 디자인을 넘나 들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처럼 팀을 새로 만드는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랙션 디자인이 되었든, UX 디자인이 되었든, 서비스 디자인이 되었든 상관없다. 그 애매함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고, 그 애매함이 결국 나를 여기 남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 2주 동안 나를 괴롭히던 위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5. 좋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좋은 결과물로 말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왜 좋아하는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 왜 좋은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내 디자인을 설득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해볼까.


만들고, 테스트하고, 수정하고, 다시 만드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