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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잔잔 Aug 10. 2020

그 남자, 창선


팔월 팔일 저녁 아홉 시.

익숙한 종이 딸랑, 울리고 조용한 공간에 사람의 말소리가 섞여 든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있던 창선은 외부의 소리를 느끼고 언뜻 움찔했다. 여고생 둘이 재잘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시간 되면 무조건 배고파. 라면 질리는데 뭐 먹지. 두 쌍의 눈이 선반을 꼼꼼히 훑으며 입을 뻐끔거린다. 같은 공간 안에 들어왔지만 그들은 창선을, 창선은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이쪽에서는 도시락 코너 앞을 서성이는 두 개의 물체 정도로 그쪽에서는 카운터를 지키는 그림자 정도로.


한쪽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지만 창선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말 그림자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 괜히 눈알을 데구루루 굴려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그의 오래된 핸드폰에 기다란 충전기의 줄이 움푹 꽂혀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링거 맞는 환자의 모습이 저렇지 않나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이름 모를 환자의 얼굴은 어느새 형이 됐다가, 창선 자신이 됐다가 푸스스 힘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여고생들은 음료수 매대 앞에서 오늘은 탄산이냐 이온이냐 고민하며 수다 떨고 있다. 역시 오래 걸리겠군.


창선이 시선을 돌려 창밖의 어둠을 바라본다. 전봇대 앞에 양복 입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대충 손가락을 털 때마다 불그스레한 담뱃재가 몇 번이나 공중으로 튕겨나가 허무하게 사라진다. 저 양복에 찌든 담배 냄새는 어떤 종류일까. 머릿속으로 담배 종류를 하나씩 읊어가며 냄새를 상상해보려던 찰나, 멀리서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카운터 위에 올라오는 음료 두 병과 삼각 김밥의 바코드를 찍는다. 여고생 중 한 명이 핸드폰을 쑥 내민다. 창선은 말없이 화면의 바코드를 찍고 봉투 필요하세요, 묻는다. 그냥 주세요. 아 맞다, 젓가락도요. 여고생이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일 년 전이었다면 그래서 봉투를 주라는 건지 물건을 달라는 건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총 육천 사백 원입니다, 대답한다. 한 명은 가방에 주섬주섬 물건을 넣고 다른 한 명은 카드를 내민다.


그들이 나가자 편의점에 다시 적막이 찾아온다. 창선의 얼굴에는 그들이 오기 전과 가고 난 후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다. 베이스 기타의 묵직한 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울려 퍼진다. 어디선가 알싸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 같다.



팔월 팔일 저녁 열한 시.

두 시간 동안 대략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주말 저녁의 편의점은 가장 바쁜 편에 속하기 때문에 정신없지만 덕분에 시간은 빨리 간다. 마지막으로 슬리퍼를 신은 다섯 명의 남자들이 맥주를 들고 우르르 나가자 잠깐 숨 돌릴 틈이 생긴다. 창선은 쉴 새 없이 많은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던 자신의 손을 낯설게 바라본다. 대형 마트들에도 주차장에도 최신 무인 계산기가 속속 등장하며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지금, 어쩌면 자신도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앙상하고 오래된 기계 팔. 나도 방전되지 않도록, 고장 나지 않도록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점검해줬으면. 어쩌면 기계의 신세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자조적인 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아까 들이닥치는 사람으로 미처 못 끝낸 폐기처리가 생각난다. 우둔한 몸을 일으켜 마저 하기로 한다.


요플레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있을 무렵, 또다시 종소리와 함께 바깥의 소리가 그가 있는 공간을 파고든다. 손에 든 것만 확인하고 카운터로 돌아오려는데 익숙한 소주 냄새가 훅 끼쳐온다. 소리로 냄새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창선은 반사적으로 이어폰 소리를 키운다. 일렉트로닉 기타가 귓가에 쟁쟁 울려 퍼진다. 음료 냉장고 쪽에서 쨍그랑 병과 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 사이를 끼어든다. 아니다 다를까, 술에 절은 남자가 소주 두 병을 거칠게 카운터에 올려놓는다.


계산해. 귀에 들려오는 섬세한 음악과 달리 둔탁한 말소리와 알콜 냄새에 저도 모르게 눈썹이 실룩 움직인다. 요즘 새끼들은 하여튼. 창선은 동요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봉투 필요하세요, 묻는다. 됐어, 그냥 줘. 남자가 소주 두 병을 낚아채듯 가져간다. 다 해서 삼천 육백 원이요.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름진 단단한 손이 순식간에 창선의 뺨을 갈긴다. 왼쪽 이어폰이 날카롭게 떨어져 나가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버릇없는 새끼, 귓구멍에 뭘 처박고 씨부리긴. 볼이 화끈거린다. 거침없이 힘을 실어 내려쳐서인지 아니면 새끼, 귓구멍, 처박고 라는 날 것의 말들 때문인지 귀가 웅웅 거리는 것만 같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기타 소리는 반으로 뚝 끊겼지만 귓가에는 계속 뭔가가 쟁쟁 맴돌며 창선을 괴롭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얼굴을 드니 눈 앞에는 잔뜩 구겨진 벌건 짐승의 살가죽이 침을 튀기며 말한다. 니네 점장이 그렇게 가르치디? 편돌이 새끼 주제에 감히 손님한테. 창선은 바닥에 떨어진 이어폰을 주워 들고 다시 왼쪽에 끼운 다음,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한다. 총 삼천 육백 원이요. 순간 짐승의 눈알이 커지며 핏줄이 발딱 선다. 이 씨발새끼가 끝까지. 남자는 분에 못 이겨 들고 있던 소주병을 계산대에 내리친다.


초록색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면서 안에 들어있던 투명한 액체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흘러내린다. 담뱃재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른 유리조각 하나가 창선의 턱을 살짝 스치고 지나친다. 살갗이 벗겨진 따끔한 느낌이 든다. 손을 들어 턱을 쓱 닦아내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못 박힌 듯 한 곳에 머무른다. 핸드폰 밑으로 투명한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역한 알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카운터 옆에 충전 중이던 핸드폰에도 흘러넘친 것이다.


문득, 창선의 눈 앞에 아까 떠올렸던 환자의 얼굴이 안개처럼 아른거린다. 어느덧 그는 새하얀 병원 복도에 서 있다. 환자복을 입은 형이 깨진 링거병을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창선을 바라본다. 등 사이로 식은땀이 흐른다. 핸드폰에 꽂힌 충전기 선을 타고 아슬아슬 맺혀 있는 소주 방울이 바닥으로 툭 툭 몸을 내던진다. 한쪽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베이스가 둥 둥 북소리처럼 들려온다.


뒷걸음질 치던 창선은 손님이 왼손에 들고 있던 다른 한 병을 빼앗아 그의 머리를 가격한다.



팔월 구일 새벽 한 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창선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몸을 눕힌다. 퀴퀴한 벽을 타고 윗집의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적막이 찾아오고 방은 고요하다.


그는 깜깜한 천장을 올려다본다. 점장이 그에게 쏟아낸 말이 온 사방에 흘러내린 소주처럼 역한 냄새를 풍기며 귀에 맴돈다. 병신 새끼. 아무리 그래도 손님 대갈빡에. 그렇게 안 봤는데 또라이새끼네. 여기가 니 핸드폰 충전소냐. 울리지도 않는 구식 쓰면서 지랄은.


창선은 앙상한 손을 들어 상처난 턱을 만져본다. 턱 아래 언저리에서 까칠한 빗금이 느껴진다. 눈을 가늘게 뜨자 뿌연 천장이 더 희미해진다. 언제부터 참고 있었는지 모를 눈물이 창선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씨발, 그러니까 이게 다 형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왜 죽어서. 왜 하필 나한테 전화를 해서. 소매로 대충 닦아내려고 할수록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터져 나온다.


결국, 그는 꺼진 휴대폰을 간절히 붙잡고 소리 내 흐느껴 운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아이처럼 울음을 토해낸다. 언젠가 다시 올 것 같던 마지막 전화는 결국 오지 않고 귓가엔 형이 좋아하던 기타 소리가 아직도 쟁쟁- 혼자 울려 퍼진다.





2020.08.9. 오늘의 상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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