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도'란 제도에서 실종된 인권감수성
그때 앵두는 한창 멋 내는 걸 좋아하던 때였다. 빨간색 틴트도 바르고, 쌍꺼풀 테이프도 붙이고 다니고, 교복도 예쁘게 줄여서 입고 다녔다. 교복이 예쁘다는 이유로 중학교를 선택했던 아이였다. 또, 앵두는 자존심도 세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칭찬받고 인정받으면 더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반항심만 커지는 아이였다. 아마 그런 성향은 대부분 청소년 아이들에게 있을 거다. 그런데 하필 그때 중1 담임 교사를 잘못 만났다. 모범생 아이들만 경험해왔던 초임 교사는 아이가 틴트를 바르고 화장한다고 선입견을 품고 대하는 사람이었다. 깜지 쓰는 날, 교무실 청소하는 날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반에서 담임에게 찍혔으니, 반 아이들 눈에도 앵두는 일종의 문제아 그룹으로 자연스레 낙인찍혔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당시 난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평일 낮에는 회계업무를 보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영상편집하는 일을 했고, 청소년 공간에서 교사로 무급봉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도 내 몫이었다. 어느 날 직장에 있을 때 아이 담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딸이 학교에 화장을 하고 오고, 지각을 자주 하는데 주의를 부탁드린다는 요지였다. 갑작스러운 전화였지만, 죄송하다고, 앞으로 잘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교사의 사무적인 목소리만으로도 아이에 대한 어떤 관심이나 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몇 주 후 다시 연락이 왔는데, 아이가 선도에 불려가게 됐다고, 학교로 방문하라는 말이었다. 시간이 그때 괜찮으시냐는 어떤 말도 없이, 그날로 선도가 정해졌고, 부모님이 못 오시면 아이 혼자 선도를 진행하겠다는 얘기였다. 사실 그때 사무실을 지킬 사람이 혼자였기 때문에 평일 낮에 학교에 가는 건 직장에 민폐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교사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간신히 양해를 구하고 그날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달려갔다.
선도가 뭔지도 모르고 그날 ‘선도’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자마자, 난 좀 어벙벙 했다. 정확히 말하면 좀 충격을 받았다. 아무 준비도 없이 여러 명한테 둘러싸여 여기저기 공격을 당하고 온 기분이었다. 왜 그때 무슨 이유로 선도가 열리는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갔을까. 교사가 그런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왜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날 선도가 끝난 후 집에 오면서 바보 같았던 나에 대한 온갖 모멸감이 밀려왔다.
선도는 마치 교사들이 한 아이를 테이블 앞에 세워두고 둥그렇게 모여서 자아비판을 시키는 자리처럼 보였다. 담임선생님이 학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서류를 쭉 읽으면, 옆에 앉은 교감과 다른 교사들이 한마디씩 거들면서 아이에게 뭘 잘못했는지 알겠냐며 용서를 구하는 자세로 잘못을 시인하게 했다. 그때 아이가 선도에 오게 된 이유는 지각 몇 번과 담임에게 대드는 말투로 말했다는 이유였다. 당시 반에서 앵두보다 지각이 더 잦았던 학생도 선도에 오지 않았으니,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딸이 담임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었다는 교사의 자의적인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아비판 시간이 끝나고 아이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후, 테이블과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혀놓았던 부모에게 드디어 발언권이 주어졌다. 이 흐름과 자리 배치는 부모가 이 모든 것을 목격한 후 담임과 교사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도록 짜여진 정교한 시퀀스였다. 당시 난 선도 분위기에 놀라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바보같이 당하고만 갈 거 같아서 서둘러 서류봉투를 꺼내 급하게 질문과 부당한 점들을 적어 보았다. 하지만 환불원정대와는 거리가 먼 내 외모와 말투는 아무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의 질문들이 교감의 화를 북돋웠는지, 5분 후 돌아온 징계 결과는 자원봉사 10시간 이라는 꽤 센 것이었다. (나중에 찾아본 규정 예시를 보니, 그 정도 징계는 학교에서 흡연을 3회 이상 걸렸을 때보다 더 강력한 처벌이었다.)
중고등학교의 선도라는 제도는 이제 더 이상 체벌이 금지된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제도적으로 취할 수 있는 강한 벌점제도 같은 것이었다. 말 안 듣는 아이 한 명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부끄럽게 만들어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제도라는 명목을 달고 운영되고 있었다. 살펴보니 아이를 선도에 보낼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은 전적으로 교사의 자의적인 판단에 달려 있었다. 중대한 사안이더라도 교사에 판단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고, 말 한마디로도 교사 지시 불복종으로 충분히 선도에 보낼 수 있었다.
학생인권조례가 있는데도 이런 제도가 학교 교칙에 있다는 게 신기해서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교칙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지만 그 아래 학생생활규정이란 것이 있어서 아이들의 머리모양과 복장까지 디테일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규정집을 다 프린트해서 꼼꼼히 살펴보니, 학교에서 선도를 합법적으로 열려면 2주 전에 미리 학부모에게 서면 통보를 해야 했다. 그때 나는 그냥 며칠 전에 학교에 오라는 연락만 받은 게 다였다. 정작 규정대로 움직인다는 학교는 그 규정집에 나온 절차와 과정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던 거다.
학교를 생각하면 답답한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내가 선도 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가장 화가 났던 건, 학교가 학생들의 인간적인 존엄함을 제도적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공식적인 제도를 아무런 성찰 없이 운영하고 있었던 거다. 교사들이 뱅 둘러서 앉아있는 테이블 대형에 학생을 의자에 앉히지도 않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게 하는 자리 배치 자체가 엄연히 비인권적인 행태였다. 거기에 있던 6명이 넘는 교사들이 그런 풍경과 분위기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 나라 공교육이 가진 인권 감수성이 아닌가, 그런 처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청소년 공간에서 있으면서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아이들이 선도에 너무 쉽게 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흡연하다 걸려서 가는 것은 물론,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떠들어도 가고, 지각을 자주 해서도 가고, 복도에서 뛰다가 걸려서도 가고, 남자친구와 손 잡아도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교사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보낼 수 있는 선도에서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묵인 아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 환경을 두 눈으로 습득하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자기 존중감을 내려놓게 만드는 제도가 과연 말 그대로 선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교사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을 쉽게 선도에 보낼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나비효과처럼 커져서 참혹하게 나타났다. 나는 청소년 아이들이 센 척하며 선도 다녀온 이야기를 호기롭게 떠든 후에 얼마나 쉽게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며 사는지 꽤 목격했다. 아이들은 선도에 갔다 왔다는 낙인을 받고, 더 격렬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게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선도 불려가서 충격을 받았던 아이들도 두세 번 불려가면서 무뎌져 갔다. 선도에 갈 때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많이 잃어버리고 온 것이다. 몸을 통제하는 체벌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통제하는 체벌이 더 강력하게 아이들을 파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린이라는 세계’란 책에는 어린이의 겉옷 시중을 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김소연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좋은 대접을 받은 어린이가 타인을 정중하게 대하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되고, 그게 기본 태도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걸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곰곰이 하다 보면, 학교란 곳에서 아이들이 어떤 태도와 양식을 오랫동안 학습하게 되는지 마음이 아프다. 한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받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나와 다른 타인과 사회적 약자를 존중할 수 있는 기본적인 태도와 습관을 지닐 수 있을까. 학교에서 우리가 진짜 배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