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살리는가 아닌가
"어떻게 저 둘은 계속 서로 옆에 붙어 있으려고만 할까? 정말 천생연분인가 봐"라는 생각이 드는 커플을 보게 되는 때가 있다. 그들 중에는 말 그대로 천생연분이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병리적 융합 관계인 경우가 있다.
천생연분이란 말 그대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란 뜻으로 서로에게 꼭 맞은 배필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병리적 융합 관계란 무엇일까? 그 뜻을 알아보고 천생연분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도 구별해 보자.
천생연분과 병리적 융합 관계가 얼핏 구분이 안 되는 것은 둘 다 각자의 파트너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렇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타인 대비 의존도도 높은 편이다. 그런데 병리적 융합 관계는 천생연분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 있는데 바로 '나와 너의 경계가 없다'라는 것이다.
병리적 융합 관계의 특성은 나와 너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나와 너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시사한다.
첫째, 둘 사이가 심리적으로 과도하게 얽혀있어서 각자의 자율성과 개별성이 상실되어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나와 너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서로 간의 경계가 없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초기 발달 과정에서 성격적인 분화, 쉽게 말해, 심리적 독립이 덜 이루어진 미성숙함이 있는 것으로 본다.
셋째, 자기애적 병리가 있음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병리적 융합은 병리적 자기애와 관련이 높다. 병리적 자기애는 자아를 강화하기 위해 타인과 융합을 추구하고, 타인을 자신의 연장선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신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독립적인 '나'를 만드는 것이 방해를 받는다.
병리적 융합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별적인 자아 인식이 어려워진다. 여기까지는 '나'이고, 여기서부터는 '너'라는 구분이 모호하다. 그러니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이 어렵다. 둘이 상당히 유사해져서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모습은 많은 시간을 공유해서 서로 닮아버린 천생연분 커플의 모습과는 다르다. 사이가 좋은 천생연분 커플에게서는 오히려 그들의 고유성이 지지되어 서로의 장점이 계발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천생연분 커플과 병리적 융합 커플을 구분하는 기준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주고 키워줄 수 있는 관계였는가이다. 한쪽의 일방적 희생이 있다거나, 양쪽이 모두 무너지는 관계라면 병리적 융합이 일어나는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병리적 융합 관계로부터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파트너와 건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자신의 건강한 심리적 경계를 인식하는 연습을 한다. 평상시에는 당연히 여기던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둘째, 자신과 파트너의 정신 상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연습한다. 미루어 짐작하거나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고, 언어적 소통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상대의 의견을 이해하여 서로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다른 존재임을 체험한다.
건강한 커플 사이에서도 병리적 융합이 발생할 수 있다.
건강한 커플 사이에서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병리적 융합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고마움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제멋대로 표출하는 태도는 이러한 융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