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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유선 Sep 15. 2024

선 넘는 말 한마디로 마음이 휘청될 때

우리는 내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는다

무례함이 매 번 피해갈 만큼 결례-프루프 (proof, 으로부터 안전이라는 뜻)인 삶은 없다. 열심히 또는 똑똑하게 살아서 무례한 사람을 접하지 않을 만큼 무례함으로부터 충분히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다시는 결례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는가? 오해도 이런 큰 오해를 하시다니.


안심은 금물이다. 인생의 파도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일 안락하고 안전해 보이는 요람에서 당신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수 있다. 속 쓰린 말이지만 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혼 후 투자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루 십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기 위해 메뚜기 상담사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 센터도 없고 딱히 소속되어 일하는 곳도 없어서 한두 달 일 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는 말이다. 그래도 일이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불러주는 곳이 없으면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흔이 조금 넘었을 때이다. 한 외투법인에서 사내 직원을 상담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급하게 일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쉬고 있던 터인데 다른 기업들보다 시간당 5,000원을 더 쳐주는 곳이었다.  주 1회 출근, 2개월 계약 조건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꼭 잡아야 한다 싶었다.


나를 불러준 회사는 유럽계 회사였는데 인적이 드문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곳에 가려면 셔틀버스를 타던지 택시를 타야만 했다. 아무리 날이 덥고 갈 길이 험해도 택시를 타고 갈 형편은 아닌 것 같아서 셔틀버스를 탔는데 정류장에서 내려서 한 십 분은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땡볕에 얼굴에 땀이 줄줄 흐르고 얌전하게 차려입은 긴 원피스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회사는 산속 요새 같은 느낌의 건물이었는데 인터폰을 누르고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문을 여니 냉동 창고에서 느껴질 만큼의 한기가 느껴졌다. 연구소가 있는 곳이라서 실내온도 조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덕분에 땀이 빨리 마르는 것 같았다.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었더니 한 십분 쯤 후에 담당자가 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흘깃 보니 외국 아웃렛에서 샀다고 해도 적어도 300불은 줬을 법한 하이힐이었다. 나도 형편이 좋을 때는 프리미엄 아웃렛 좀 다녔던 사람이다.


기업 내 상담 관리는 인사과에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회사도 인사 담당자가 상담 관리를 했다. 외투법인 인사 담당자들은 보통 세련된 외모와 예의를 갖췄다. 외투법인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내가 다녔던 인사팀의 인사 담당자들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당했다. 한 여름의 땡볕이 이글거리면 좀 어떤가. 이혼과 전직, 상담료로 시간당 오천 원을 더 준다고 해서 냉큼 달려온 이 발걸음까지 모두 내 선택 아니었던가. 나는 내 결정을 당당히 감당하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인사 담당자가 명함을 내밀며 나에게 건넨 한 말에 내 마음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어서 자리를 잡으셔야 할 텐데."


너무 당황스러운 말을 듣게 되면 내가 잘못 들었나 싶고 멍해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격 중에 최고 공격은 기습공격이라고 하나보다.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명함을 공손히 건네받는 것이었다. 잠시 멍했지만 회의실에서 3명의 내담자를 차례로 만나 무사히 상담을 마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은 두 달 계약 기간이 종료되고 계약 연장을 하자는 인사담당자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인사담당자가 상당히 짜증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 어서 자리를 잡으셔야 할 텐데.


어머, 어서 자리를 잡으셔야 할 텐데.


왜 그 말이 그토록 오랫동안 나에게서 떠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봤다. 그 말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선을 넘는' 말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 재미있는 말도 선을 넘으면 파괴력을 갖는다. 인사 담당자 눈에 내가 자리를 잡아야 하는 처지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와 그녀의 관계는  초면에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관계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을 관계가 아닌데 그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선 넘는다'라고 한다.


그날, 마음이 휘청거린 것 치고는 문제없이 상담을 했고 두 달간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그랬다. "당신 선 넘었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입을 다물고 회의실 테이블 위에 상담일지를 펴고 내담자를 기다려  상담을 마쳤다. 흔들리는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으면 우리는 감정에 덜 흔들릴 수 있다. 그때 나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해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직한 심리상담사라는 직업과 시간당 오천 원을 더 주는 시급이었다. 마음이 휘청거려도 휘청거리는 감정을 버텨줄 더 중요한 것들, 예를 들어, 가족, 신념, 가치, 재화 등 감정을 버티는 대가로 지키거나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찾으면 우리는 감정이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아마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다. 감정이 일어나고 나서 생기는 긴장감을 꾹 참고 모면하고난 후, 그다음이 중요하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감정을 외면했다면 꼭 그 감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정신과의사를 만나 "감정을 쌓아두기만 해서 우울증이 생겼습니다"란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울증이 걸린다고 협박하는 거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정을 쌓아두다 우울증이 걸려서 오는 사람들을 정신과 심리치료실에서 목격하고 있다. 일하다 보면 상사나 거래처 사람에게 싫은 소리 좀 들을 수 있지 뭘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 하루에 여러 개가 동시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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