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로 일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모르겠어요,' 다음으로 자주 듣는 말이다.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흑백논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비합리적 신념이다.
상담실에 오는 사람 중에는 왕년에 1등 좀 해봤던 사람들과 1등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했으면 한대로, 못했으면 못 한대로 '1등 하기'란사람들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잘했다. 최고다" 인정을 얻으려면 1등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1등이어야 한다는 비합리적 신념이 생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학력이 힘이 되고, 학벌이 돈벌이에 도움이 되고, 승자의 이름만 기억돼서 그렇다. 1등은 학력, 학벌, 명성을 얻는데 유리한 카드가 된다.
'열심히 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성실의 미덕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속에는 이왕이면 최고가 되라는 메시지, 모두를 이기고 정상에 오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1등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서는 할 수가 없다. 자연스러운 욕구를 포기해야 얻을 수 있기에 일상의 만족은 줄어든다. 애쓴 만큼 이루지만, 이룬 만큼 잃게 되는 1등이라는 굴레, 참으로 피곤하고 답답한 굴레다. 나도 꽤 오래 지고 살았다. 1등의 굴레를 쓴다고 다 1등을 하는 것은 아니다.
1등이라는 굴레, 참으로 피곤하고 답답한 굴레다.
이 굴레를 처음으로 벗은 곳이 주짓수 체육관이었다. 취미로 하는 거라 부담이 적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모르는 말씀이다. 체육관은 학교나 직장보다도 실력의 줄 세우기가 수월한 곳이다. 매 번 스파링에서 승패가 가려지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뻔히 안다.
열심히 해서 최고가 돼야 한다는 생각의 틀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짓수 체육관은 참으로 조바심 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으면, 조바심은 불안으로 바뀐다. 이 불안을 버텨내야 계속 수련할 수 있다.
닌자처럼 몸을 굴려내는 동료들 틈에서 손 짚고 앞구르기도 못하던 나는 체육관에서 1등이 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꿈꾼 적도 없다. 그래도 중간은 되고 싶었나보다. 잘하는 쪽으로 눈에 띄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둔하고 느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새로 입관한 수련생보다도 못하는 것 같아 초조했다. 수업시간마다 속으로 "아. 바보 같다."란 말을 무한 반복했다.
하느라고 하는데 난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변화는 일어난다는 확신. 마음공부를 하면서 얻게 된 믿음이었다.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해야 겠다는 오기가 생겼고, 그 힘으로 버텼다.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차츰 나의 주짓수에도 변화가 생겼다. 입이 절로 벌어지는 플라잉 암바나 베림보로 기술을 해내지는 못하지만, 앞구르기, 뒤구르기, 옆구르기, 구르기 3종 세트만은 자신이 붙을 정도가 되었고, 기본 암바나 트라이앵글 기술도 스파링에서 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초조했다.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였다.
인정받고 싶어 꿈틀대는 내 마음이 보였다. 이기고 싶고, 지기 싫고, 승패에 연연하는 마음이 드러났다. 상담사 수련을 위해 합숙소에서 몇 날 며칠 마음수련을 할 때처럼 마음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마음은 드러나는 만큼 조절할 수 있다. 최고가 되고 싶어 꿈틀대는 마음을 달래주었다. 괜찮다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힘든 거라고 내 마음에 말해주었다. 그러자 수련을 하면서 느껴지던 초조함이 점점 사라졌다. 불안함은 줄어들고 즐거움이 커졌다.
움직일 수 있으니 좋았고, 함께 할 수 있으니 좋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아 죽지 못한다는 말처럼, 매트에서 구를 수만 있어도 좋았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남아있었지만 운동을 하는 기쁨이 더 컸다.
사진 : Paul Kee Jean
하루는 체육관에서 수련생들이 몇몇 모여있는데, 사범님이 다들 잘하고 있다며 칭찬을 하셨다. "A는 참 똑똑하게 해. 영리하게 주짓수를 해. B는 기술이 많이 늘었어. 내가 정말 놀랐어." 수련생들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나에게는 무슨 말을 해주실까 궁금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칭찬을 해주시던 사범님은 나를 보시더니 이런 말을 하셨다. "극복한 거로 치면 최고지." 그 한마디에 인정에 고팠던 마음이 채워졌다. 뿌듯함으로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보이는 것으로는 일등이 될 수 없지만, 남들은 할 필요 없는 노력을 하다 보니 극복한 것으로 치면 최고가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을 지켜보고 인정해준 사범님 말 한마디가 따뜻하고 든든했다.
체육관에 남아 있기만 하면 최고가 된다.
체육관에 남아 있기만 하면 최고가 된다. 누군가는 실력으로, 누군가는 끈기로, 누군가는 명석함으로,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이끌어 주면서 최고가 된다. 체육관 매트에 고꾸라져 넘어져도, 버틸 수 있다면 자신에게 엄지를 세우며 원더풀이라고 할 날이 온다.